유성룡 “문무에 능통한 보기드문사람”

경북 상주 충의사에 모시고 있는 정기룡 장군 위패. 명나라 장군 마귀는 이순신, 한명련, 권율과 더불어 정기룡 장군을 조선 제일이라 하였다.
경북 상주 충의사에 모시고 있는 정기룡 장군 위패. 명나라 장군 마귀는 이순신, 한명련, 권율과 더불어 정기룡 장군을 조선 제일이라 하였다.

삼가현에서 왜군 격파 후 납치된 백성을 구하다

1598년 3월24일 왜적이 삼가현 율원에 침입해 악행을 저지르고 있어 정기룡 장군은 합천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장수 해생을 설득했다. 연합군 3000여명을 거느리고 왜적을 유인해 공격하기로 하였다. 장군은 미리 선봉장 한명련과 우후 박대수로 하여금 삼가현의 읍내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

이튿날 닭이 울 때 농부로 가장한 궁수 30여명을 적진에 접근케 하여 불을 지르고 화살로 공격하였다. 적이 혼란에 빠졌다가 반격해오자 장군의 군사들이 오색군기를 휘날리며 곧장 쳐들어가니 적군이 삼가현의 대평으로 도망가 산 위에서 저항하였다.

짐짓 군사를 퇴각시켜 적군을 유인하니 적군이 평지로 내려와 삼가현의 서문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 때 장군은 잠복해 기다리던 한명련, 박대수의 군사와 합세하여 포위 공격하였다. 적병 수급 73개를 명나라에 주었으며, 적에게 잡혀있던 남녀 100여명을 구출하였다.

명나라 황제 명령으로 총병관으로 임명되다

1598년 4월20일 함양 사근역이 적군에게 점거 당했다는 정보를 접한 정기룡 장군은 명나라 부총관 이녕과 함께 왜적을 공격했다. 명장 이녕이 가볍게 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최선두에서 적을 격멸하다 적의 조총에 중상을 입고 전사하였다. 그러나 장군이 다른 방면에서 적을 무수히 베고 전진해오자 왜군은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군대는 적 수급 1백여개를 베었으며, 우리 군대는 수급 200여개를 베었다. 명장 이녕이 전사했기 때문에 남은 군대가 모두 정기룡 장군에게 예속되기를 원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청하였다. 이에 명나라 조정의 어왜총병관으로 임명 받아 명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무너진 명나라 군대 진주까지 도망쳐

1598년 8월17일 풍신수길이 죽었다. 퇴각하려는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 9월19일 진주성에 조명연합군이 입성하였다. 정기룡 장군이 선봉이 되어 20일에는 명진채를, 22일에는 영선채를, 23일에는 곤양채를 공격하여 불태웠다. 28일에는 보병 2천과 기병 1천을 이끌고 사천읍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튿날 치열한 백병전 끝에 성을 점령하였다. 선진리 본진을 공략하기 위하여 10월1일 아침부터 조명연합군이 공격하였으나 성안으로 진입하려 할 때 명나라 진중에서 불랑기포가 오발하여 연쇄폭발을 일으키는 대혼란이 일어나자 왜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반격, 명나라 군대는 한꺼번에 무너지고 진주까지 도망쳤다. 명나라 군사의 사망자는 1만여명이었으나 장군의 조선군사는 한 사람의 손실 없이 되레 적의 수급 50여개를 베고 식량까지 운반하며 철군하였다.

61세 통영수군 통제영에서 순직

영의정 유성룡은 정기룡을 평하길 문무에 모두 능통하다 하였다. 선조 임금에게 주청하기를 “기룡은 젊고 재략이 있는가 하면 또 목민에도 능합니다. 그가 상주판관으로 있을 때 상주사람들 모두가 하는 말이 판관을 목사로 올리면 다시 판관을 낼 필요가 없다 합니다. 소신이 보기에 이만한 사람은 요사이 보기 드뭅니다.”

정기룡 장군에 대한 평가는 조선측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명나라 장군 마귀는 선조임금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은 것도 어려웠으리라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장군은 전쟁이 끝나자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61세에 통영 수군 통제영에서 순직하니 임금이 조회를 폐하고, 예관을 보내 제문으로 조문하였다.

문찬인 하동 향토사연구소장 / 정기룡장군 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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