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갑
시인, 수필가, 이학박사
시림문학회 회장

지난 봄 색(色)에 미처 찾아 나선 늘그막한 남자. 그 동안 꼴 불문하고 헤매고 다닌 보람으로 어린 동안(童顔)들을 만나 살점 하나 발끝하나 다칠까 흙 한 톨 흘림 없이 고이 모셔 집 근처 논에다 심은 나무들이 있다. 잡초 속 얘들이 성장해 제구실을 할 날은 적어도 5~6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 사이를 참지 못해 달려 간 곳이 해발 높은 강원도 땅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이다. ‘강성대’ 아래 ‘대세계회전축’이라는 무거운 명찰을 달고 웅장하게 우뚝 선 석탑 앞에 1년에 한 두 번은 들러 마음을 내려놓고 추스르는 곳이기도 하지만 정작, 한 여름 견우직녀가 만나고 매미소리 계곡물소리 가득한 때라 그것으로 만족했지 단풍구경이 목적인 때는 없었다. 그러나 지난 해 그토록 보고 싶은 단풍을 회령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대장산(대장봉) 정상부근에서 참나무 군락이 토해 낸 붉고 노란 단풍을 원 없이, 그것도 눈물겹도록 가슴 저려가며 본 이후 금년에도 그냥 넘길 수 없던 터에 염색 현장에 보관 된 염료양이 부족할 것 같아 단 숨에 결정하고 이곳 진주 금곡에서 한 걸음에 확실한 이유를 앞세워 그 곳으로 달려갔다.

간 밤 된바람 고함에 놀라/ 낭떠러지 떨어져 부러진 붉은 지팡이/ 아픔의 눈물인지 이별의 통곡인지/석골(石骨) 솟아 올린 산/ 작은 계곡 껴안은 포근한 능선/ 정상에서 꾸역꾸역/ 토해 낸 붉은 눈물/ 노란 눈곱 앞세워/ 끊임없이 넘쳐 오니/ 대청(竹膜) 같은 마음에 들장미 피네.

고픈 배 움켜쥐고 보리, 나락, 고구마, 이삭 줍던 시절. 논 밭 주인 고함소리 소스라치게 놀라 오지랖에 쌌던 이삭 땅바닥에 쏟아 붓던 아릿한 심정. 불철주야 잠 못 자며 부모걱정 가족걱정 세월 가는 날 모르고 지금껏 걸었지만 이제 떠나 간 자리. 가정 사회 불문하고 내 설 곳 마땅찮아 아침저녁 눈치 보며 들락거리는 세월 잡순 노령들. 찬란했던 여름, 해 달 속에 묻고 묻어 찬 서리 둘러 쓴 고독한 이파리 되어 마지막 발악으로 붉고 노란 색동 치마 둘러쓴 채 바람타고 떨어지는 어이없는 단풍! 곧, 닥아 올 차가운 북풍 오기 전에 들장미 꺾어 안고 아랫목에 들고 싶네.

아침 이슬이 걷힐 듯 말 듯 한 햇살아래 흥정산 계곡 옆 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희망의 나무 그 이름 ‘신나무’. 가슴 쿵덕 이며 만났던 작년 어느 봄날의 거침없는 색(色). 그 색이 떠나기 전 달려 왔건만 소식 없이 떠나 간 몇 몇 단풍에 저린 마음 새겨 접고 황금색, 회색, 검정색을 꿈꾸며 여린 가지를 자른다. 마치 이 색들로 가을과 겨울을 만드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아니 인생의 마지막 열매를 영글게 하는 작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2박3일 동안 염료 채취와 정선작업 하는 동안 회령산 지킴이 두 님. 그리고 무거운 난관 속에서도 거른 이(齒) 바로 잡아 새 생기 불어 넣는 치과 원장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신나무 물결 따라/ 붉은 결 넘쳐나고/ 흐르는 계곡물에 얼굴 묻고 마시는 물/ 자작나무 자작자작 이야기가 숨어 있고/ 신나무 뿜어 낸 빛 옷깃마다 물들어/ 가마솥에 안친 밥 귀한 손님 먹고 가고/ 회색도포 두른 과객 햇살 따라 걷고 있네.

이번 걸음을 두고 가을 타는 남자라고나 할까? 그리움과 추억 그리고 현실과 얽혀 살아가는 아리송한 우리의 삶. 이 모두가 황홀하고 찬란한 색을 둘러 쓴 단풍이 그렇지 않은가. 어느 누구 하나 곁에 없어도. 어느 누구 지켜보는 이 없어도 그래도 탈 것이 있어 좋지 않은가. 이 달콤하고 황홀한 가을 속에서.

<가을 타는 남자>

차 없는 몸도 탈 것 있어 좋구나

돈 들 걱정 없어 좋고 가슴 떨려 좋지만

시리고 아픈 마음 가라앉힐 재주 없어

빈 바위 걸터앉아 지는 단풍 눈에 담네.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