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택

1801년 ~ 65년에 미합중국의 북부와 남부가 벌인 내전(內戰)이 4년에 걸친 격전 끝에 남부는 패하여 다시 연방(聯邦)으로 복귀하는데 10여년이 걸렸다. 나라가 갈라져서 싸운다는 것은 확실히 국민적 비극이었으나, 미합중국은 이 엄청난 시련을 이겨내고 자유와 평등을 위해 국가적 단결을 한층 굳혔다.

이 전쟁의 원인은 복잡하고 그 배경도 광범위했으나, 전쟁의 직접적인 동기는 주(州)가 연방으로부터 분리·탈퇴한다는 것이 헌법에서 인정되고 있는가의 여부에 관한 헌법해석의 문제였다. 이 밖에 이 문제를 유발시킨 노예제도 시비, 그리고 이와 관련된 동서남북 각지역간의 이해, 대립 등 실로 많은 문제가 얽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860년의 대통령선거는 남부의 운명을 건 중대사였다.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와 공화당의 승리이다. 남부가 우세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를 계기로 남부의 7개주(앨라배아,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사우스캐롤라이나,텍사스)는 연방으로부터 이탈할 결의를 굳힌 가운데, 61년 2월 미국남부연합을 조직하였다. 이에 대하여 링컨은 어느 주도 연방으로부터 분리·탈퇴할 권리는 없다고 하여 남부 7개주의 이탈을 인정하지 않았다. 61년 초에 남부와 북부의 점진적 분리 상태는 이미 심각할 대로 심각해졌다.

1861년 4월 6일 링컨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수도 찰스턴 항구에 있는 섬터요새에 식량을 보내려하였다. 남부연합은 이것을 연방특위 지원행동으로 보고, 지금이야말로 남부에서 연합군을 몰아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4월 12일 새벽을 기하여 남부연합군대는 섬터요새를 포격하였다. 그러자 링컨은 남부의 해상봉쇄를 명령하였고 7만 5,000명의 지원병을 모집하였다. 여기서 남북전쟁의 포문이 열린 셈이다. 또한 이때까지 결정적 태도를 보류한 노예주(奴隸州) 가운데서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버지니아 등 4개주가 가담하고 켄터키메릴랜드 미주리는 연방에 머물렀다. 버지아의 서부지방은 주(州)동부와 이해를 달리하였다. 63년 독립하여 웨스트버지니아주가 연방에 가담하였다. 이 연방에 남은 노예주는 지리적으로 자유주(自由州)와 접하여 중간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그 위 경계주(境界州 : border states)라고 불리게 되었다.

섬터요새 공격사건 이후 북부에서는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로 전진하라는 외침이 날로 높아져갔다. 7월 4일 링컨은 상비병(常備兵)의 확대, 비상지출, 공채(公債) 모집, 관세인상, 50만 명의 의용병 모집 등 일련의 비상조치를 취하였다. 워싱턴 주변에는 즉각 3만여 명의 군대가 집결하고 , 또한 1만 4,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셰넌도어 계곡 북단(北端)까지의 방비를 공고히 하였다. 한편 남부는 섬터요새 공격의 성공에 힘입어 전쟁을 단숨에 승리로 끝내고자 워싱턴 공략을 목적으로 진군을 서둘렀다. 7월 21일 북군과 남군은 드디어 부를랑강(江)에 대치하여 대회전이 벌어졌다. 북군은 수적으로는 약간 우세하였으나 훈련과 실전경험 부족으로 전투가 몇 시간 계속되자 대열이 흩어지고 마침내 워싱턴 방위선까지 전면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최초의 일대 접전은 양군에게 전쟁의 속전속결(速戰速決)이 어렵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북군의 최대 목표는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넌으로의 공략이었다. 북군은 1862년까지 약 15만 명의 병력을 이 공략전에 투입하였으나, 62년 4~7월의 반도 작전(半島作戰)의 실패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목표달성은 어려웠다. 매콜렐럼이 지휘하는 북군은 해로(海路)로 남하하여 오크강과 제임스강 사이에 끼어있는 반도에 상륙, 남쪽으로부터 리치먼드를 공략하려고 하였다. 이때 남군 사령관에 임명된 사람은 훗날 남부의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일컬어지게 된 R.E 리였다. 남군은 리장군의 뛰어난 판단력과 면밀한 작전으로 리치먼드 가까이 까지 육박한 북군을 “7일 전투” 끝에 반도에서 격퇴시켰다. 리는 자신이 이끈 군대를 노스버지니아 군단이라 명명하고, 전선(戰線)을 노스버지니아, 즉 남부연합의 최전전(最前線)으로 복귀시키고자 9월에 최초의 북구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어 다음해 7월 두 번째 북부 침공을 감행, 남북전쟁 중 최대의 격전으로 불리는 게티즈버그 전투가 되었다. 63년 7월 1~3일 펜실베니아주 남부의 게티즈버그에 진격한 남군은 북군을 이곳에서 몰아내어 아래쪽의 고지(高地)로 밀어붙였다 양군이 대치하는 전선은 5km까지 벌어져 맹렬한 전투가 몇 차례 걸쳐 되풀이 되었으나, 7월 4일 마침내 리장군은 버지니아를 향하여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추격한 북군은 포토맥강에서 남군을 섬멸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북군을 지휘한 미드장군은 옛친구 리에 대한 우정을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포코맥강을 무사히 건넌 리는 그 뒤 다시는 북부 침공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남군은 2만 5,000명, 북군은 2만 명의 전사자를 낼 만큼 인명손실이 막심한 것이었다. 북부에 비하여 남부의 인적(人的), 물적(物的) 자원은 훨씬 뒤져있었기 때문에 남군이 이미 막대한 피해에서 세력을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부전선에서 남군의 우세는 역전되어 남북전쟁은 일대 전기(轉機)를 맞게 되었다.

북군의 제 2의 목표는 미시시피강 협곡의 제패였다. 이 방면에서는 율리시즈 S.그랜트 장군이 서부의 정예군을 이끌고 물샐틈없는 작전을 벌였다. 1863년 7월 미시시피강의 도하점(渡河點) 빅스버거를 함락시킨 그랜트 장군은 그 해 가을 셔먼의 테네시군단을 전선에 배치하여 험준한 산악에서의 혈전(血戰)이 채터누가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북군은 채터누가를 점령하여 테네시강을 장악하였다. 이와 같이 서부전선에서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연전연승하던 북군이 63년 말까지는 미시시피강 협곡제패를 달성하였다. 64년 3월 그랜트 장군은 그의 혁혁한 활약과 공적이 인정되어 북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남북전쟁이 시작될 무렵 북군의 해군력은 분단된 40척의 목조 전함뿐이었으나 북부의 공업력과 기술로 해군력의 강화와 재편성을 신속히 수행할 수 있게 하여 1868년까지는 링컨의 남부 해안 봉쇄포고를 유효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세력을 확보하였다.

1862년 3월 북군의 장갑함 모니티호(號)는 남군이 자랑하는 장갑함 리맥호와 접전함으로써 남북전쟁 중 최초의 대해전(大海戰)을 전개하였다. 이 싸움은 철제 전함의 위력을 처음으로 선보인 해전으로서도 주목되었다. 이어서 북군은 남부의 가장 중요한 항구인 뉴올리언스를 해상으로부터 공약하여 서부전선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64년 8월의 모빌항(港) 대해전은 북군의 해상봉쇄를 완벽하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남부는 목화의 대(對)유럽 수출과 탄약, 의류, 의약품 등의 수입을 방해받게 되자 경제적, 군사적으로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1864년 5월 북군은 새총사령관 그랜트장군의 지휘아래 대공세를 개시하였다. 서부 전선에서는 셔먼장 지휘하의 북군이 채터누가에서 애틀랜타로 전진하여 포위작전과 우회작전을 전개하면서 시내로 통하는 철도선로를 확보하여 열세에 몰린 남군을 후퇴시키고 9월 3일 애틀랜타를 점령하였다. 이어 11월 대서양을 향하여 애틀랜타에서 다시 진격을 개시한 셔먼 장군휘하의 부대는 12월 20일 마침내 해안도시 서배너를 함락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셔먼장군의 “대행진” 이라는 작전이었다. 이때 셔먼은 링컨에게 전보를 쳐서 이 서배너의 도시를 크리스마스선물로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셔먼은 여기에서부터 북상하여 그랜트의 공세를 돕게 된다. 동부전선에서는 그랜트가 남군의 주력인 리의 지휘 하에 노스버지니아 군단을 섬멸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하였다. 5월 5일의 월더니스 전투로 시작하여 약 1개월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투를 계속한 끝에 피터즈버그에 포진한 남군을 포위한 지 9개월만인 65년 4월 마침내 남군전선을 돌파하는 한편, 파이브에서의 측면 공략에도 성공하였다.전사자와 도망병 때문에 2만 5000명으로 약화된 노스버지니아 군단이 서쪽으로의 퇴로마저 차단되자, 리는 더 이상의 저항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최후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항복하기로 결심한 리는 그랜트에서 편지를 보내어 회견을 요청하였다. 4월 9일 애퍼매틸스코트 하우스에서 양군의 최고 사령관인 그랜트와 리의 회견이 이루어져 4월 12일 남군의 항복이 정식으로 인정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전쟁은 예상외로 장기화 한데다가 그 양상은 대단히 심각하고 격렬하였다. 남북 쌍방이 입은 인명피해는 막대하여 북부는 총 동원수 200만 명 가운데 전사자 36만 명, 남부는 70만 명 가운데 전사자 25만여 명으로 추정되었다. 패배한 남부는 여러 면에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남부의 대부분은 전화(戰禍)로 황폐화되고, 1863년 1월 1일 발표된 노예 해방 선언으로 그 전통적 경제구조는 근본적으로 무너졌으며 공업면에서 앞선 북부의 식민지적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종전 직후인 4월 14일 링컨이 총탄에 쓰러지자 그가 주장하던 광대한 남부 재건안(再建案)은 묵살되었기 때문에 남부는 군정하(軍政下)에 놓이게 되고, 북부의 억압 밑에 놓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77년까지는 차례로 연방 복귀가 완료되었으나 자부심이 강한 남부 기질로서는 견딜 수 없는 굴욕적 경험이 북부의 공화당을 용납할 수 없어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솔리드샤우스(solid south)를 탄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주 패권국인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전통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의 정당제도는 어떤 전통과 형태로 가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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