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 신분상승운동이 형평운동의출발
전국 백정인구 40만명이 형평사 회원

형평운동은 1923년 4월24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결성된 형평사에서 시작돼 1935년 4월24일 제13차 형평사 전국대회 때 단체 이름을 대동사(大同社)로 바꿀 때까지 지속되었다. 형평사는 일제강점기에 가장 오래 활동한 사회운동단체라는 점에서, 그리고 진주는 형평운동의 발원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형평운동은 1920년대 초 진주를 중심으로 최초로 일어난 신분상승 운동으로, 당시 어느 지역에서나 천시되었던 백정 신분 사람들이 본연의 인권을 찾기 위한 운동이었다. 이는 다른 지역에선 감히 실행할 수 없었던 운동으로, 평등과 호의정신을 바탕으로 백정들이 사활을 건 저항을 했다는 점에서 진주정신의 발현이었다 볼 수 있다.

지난달 10일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인근으로 옮겨져 제막식을 가진 형평운동기념탑. 사진=박청기자
지난달 10일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인근으로 옮겨져 제막식을 가진 형평운동기념탑. 사진=박청기자

진주의 공사립교육기관 직업운동가 배출에 기여

1920년 당시 진주 인구는 2만4천여 명이었다. 그 중 약 350명 정도 백정들이 진주에 살고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봉건 신분제도는 철폐되었으나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지속되었고, 일제강점기 아래서도 이러한 상황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백정들에 대한 극단적 차별의 예들을 몇 가지 들어보면, 1907년 진주지역 교회에서 일반교인들이 백정들과 동석 예배를 거부한 사건이나, 백정의 자제들이 학교에 입학하더라도 상민 자제들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같은 천민 신분이었던 기생들조차 백정들 모임에 참석하기를 거부할 정도였다.

이 같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 외 형평운동이 발생한 배경에는 진주지역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과 백정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 1920년대 초 진주에는 각 부문에서 직업적 운동가들이 주도한 민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진주청년회 중심의 청년운동, 진주노동공제회(진주노공)가 이끌었던 노동농민운동, 각 종교단체와 연계돼 전개된 여성운동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로서 비교적 일찍 서구문물과 접하며 근대 공사립 교육기관들이 설립돼 있었다. 이러한 교육기관들이 각 부문 운동의 대중적 확산과 직업운동가들을 배출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진주는 1862년 일어난 진주민중항쟁이 진주의 정치문화적 기반이 되었고, 갑오농민전쟁 때도 진주는 농민군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1923년 4월24일 형평사 설립 발기대회 열어

이러한 사회, 역사적 조건과 함께 진주지역에서 형평운동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던 요인은 백정 사회에 축적된 경제적 기반이었다. 전통적으로 백정들은 일반인들이 꺼려하던 도살업, 고기판매업, 유기제조업 등 특수 직종에서 일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일반인들로부터 심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경제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는 도살업이나 고기판매업이 재물을 모으는 중요한 수단으로 바뀌어갈 정도였다. 1920년대 초 상설시장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진주공설시장에서 가게를 갖고 있던 백정 상인들이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형평사를 만드는데 적극 참여, 실무 임원진을 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역동적 과정을 겪어온 진주지역에서 사회운동가들과 백정사회 부유한 지도자들은 1923년 4월24일 진주청년회관에서 형평사 설립을 위한 발기대회를 열고 이튿날 창립총회를 열었다. 총회에서는 앞으로 형평운동을 이끌어갈 임원을 선출하였다. 중앙집행위원으로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장지필, 이학찬 등을 선출했다. 간사로는 하석금, 박호득을, 이사로는 하윤조, 이봉기, 이두지, 하경숙, 최명오, 유소만, 유억만을, 재무에는 정찬조를, 그리고 서기에는 장지문을 각각 선출하였다. 중앙집행위원 중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은 비 백정으로 진주지역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지식인 출신의 직업적 운동가들이었고, 나머지 장지필, 이학찬 등은 백정의 후예로서, 장지필은 지식인 출신으로 이학찬은 진주공설시장에서 고기판매업을 통해 상당한 경제력을 가진 인물로서 백정사회를 지도하던 사람이었다.

진주 석류공원에 있는 강상호의 묘. 백정 출신 강상호는 1923년 4월25일 진주청년회관에서 열린 형평사 창립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 됐다. 사진=박청기자
강상호의 묘. 강상호 선생은 1923년 4월25일 진주청년회관에서 열린 형평사 창립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 됐다. 사진=박청기자

1935년 형평사를 대동사(大同社)로 바꿔

형평사는 진주에 본사를, 각 도에 지사, 각 군과 유명 마을에는 분사를 두는 전국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당시 형평사 측에서는 전국 백정 출신 인구를 추정해 회원수가 대략 40만 명 정도였다. 형평운동을 감시하던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자료에 따르면, 형평사 창립 1년 만에 12개 지사와 67개 분사가 생겼고, 1928년에는 단위 조직체가 162개, 활동가 수가 9688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형평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형평운동에 대한 반대 움직임도 나타났으며, 형평사의 조직 확대에 따라 운동단체 내부에서도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진주의 기생조합이 형평사의 창립축하식 여흥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으며, 1923년 5월24일에는 진주지역 24개 동리 농청(農廳) 대표자들 모임에서 소고기 불매운동을 결의하였다. 내부적으로도 창립 1주년 뒤부터 본부를 진주에 두자는 진주파와 서울로 옮기자는 서울파의 파벌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장지필을 지도자로 하는 서울파는 1924년 4월 서울에서 형평사 혁신동맹 총본부를 발족시켜 독자적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방의 백정들 사이에서 형평운동 통일에 대한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그해 8월 ‘형평사 중앙총본부’라는 이름으로 일단 통합된다. 이때의 통합은 장지필, 강상호의 공식 사퇴와 함께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도 조직이 체계화되어 갔다.

또한 1926년의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장지필, 서광호 등이 검거됨으로써 형평사는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단체가 아니라, 민족해방운동 내지 사상단체로서 그 성격이 명확히 전환되어 갔다. 1928년부터는 형평사 내부에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에 중점을 두는 온건파와 계급투쟁의 측면을 중시하여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급진파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후 형평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크게 위축되었고, 1935년 형평사를 대동사(大同社)로 바꾸면서 인권운동의 본래 성격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형평사가 대동사로 이름을 바꾼 뒤 사실상 형평운동은 멎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누리고 평등한 대우를 받아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형평운동의 이념은 여전히 필요하다. 형평사가 창립된 진주에서는 1990년대 들어 그러한 형평운동의 정신을 존중하고 기리는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형평운동의 학술적 성과를 논의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리고, 형평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을 건립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는 문화 활동과 인권운동이 일어났다. 이처럼 진주에서는 인간 존엄성 실현과 인권 존중을 실천하는 사회를 만들려 한 형평운동 정신을 귀중한 자산으로 삼고 있다.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를 수반해 이 지역 학자들이 본 운동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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