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의 특별한 이야기

[소리의 전승과 명창 배출]

일찍부터 진주에 설치되었던 교방에서는 판소리보다는 가곡·시조창·가사·잡요·단가 등 주로 상류층에서 즐기던 소리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오늘날의 판소리창은 교방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소리광대들이 전국 각지를 돌면서 공연을 함으로써 활성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진주는 동편제소리의 주 활동 무대였는데, 조선 후기에 병영이 있던 진주에서의 판소리에 관한 기록은 정노식(鄭魯湜) 저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의 송흥록(宋興祿)[1800~?]에 관한 기록 중 맹렬(孟烈)에 관한 연애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송씨가 대구감영에 불려가서 소리를 하는데, 명창이란 칭찬이 만좌에 넘쳤으되, 인물과 가무의 일등명기로 당시 수청으로 있는 맹렬의 입에서는 한마디 잘잘못의 평이 없었다. 송씨가 그 곡절을 알지 못하여 그 이튿날 맹렬의 집을 찾아가서 그 모에게 맹렬을 좀 보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여 무슨 핑계로 맹렬을 불러 나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송씨는 맹렬에게, 어젯밤 소리판에서 한마디의 평이 없은 것을 물으니, 맹렬은 웃고 그대의 소리가 명창은 명창이나 아직도 미진한 대목이 있으니 피를 세 동이는 더 토하여야 비로소 참 명창이 되리라고 한다. 송씨는 그 길로 자기 고향인 비전으로 돌아와 그곳 폭포 밑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목을 얻으려고 소리를 지르는데, 며칠을 지난즉 목이 아주 잠겨서 당최 터지지 아니한다.

그렇게 석 달을 고생하다가 하루는 목구멍이 섬섬거리며 검붉은 선지피를 토한 것이 거의 서너 동이 폭이나 되었다. 따라 목이 터지기 시작하여 필경 폭포 밖으로 소리가 튀어나게 되었다. 그 뒤에 다시 대구에 가서 선화당에서 소리를 하는데, 소리도 소리려니와 일단 정신은 맹렬의 동정을 살피는 데 집중이 되었다. 소리판이 끝나기를 기다려 감사에게 무슨 핑계를 하였던지 몸을 빼어 송씨의 처소로 나와서 그 밤으로 행장을 차려가지고 대구를 탈출하여 송씨의 고향인 운봉으로 왔다.

맹렬은 본래 여자의 본능인 투기성이 강하여 송씨가 어디든지 불려가게 되면 반드시 회환할 일자를 확정하여 만일 하루라도 어기는 일이 있으면 집안은 풍파의 와중에 휩쓸리고야 마는 것이 별로 진기한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진주 병영에 불려가게 되었는데, 왕환 이십일 작정한 것이 여러 가지 사고로 이삼 일간을 더 지체하게 되었다. 송씨는 곧 그리된 사연을 세세히 적어 사람을 시켜 전언을 하였다. 맹렬은 그 편지를 떼어보지도 아니하고 그 전인에게 송씨의 내(來)·불래(不來)를 묻고 하는 말이, 내가 이 편지를 떼어볼 것도 없으니 송광대에게 가서, 가더라고 말하라 하고 곧 봇짐을 싸가지고 나선다.

송씨는 침식을 전폐하고 천신만고 맹렬의 행방을 수탐하다가 진주로 가서 병사 이경하의 수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진주로 들어섰다.

이때 맹렬이는 송씨가 왔단 말을 듣고 병사에게 말하여 송씨를 불러 소리를 시키되, 분부하시기를, 너는 본래 명창이니 네가 소리를 하는데 능히 나를 한 번 웃게 하고 또 한 번 울게 하면 상급을 후히 하려니와, 만일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숨을 바치리라 하시고,(중략)

어느 때 진주 촉석루에서 판소리를 하는데, 만좌는 모두들 느껴서 눈물을 금치 못하였고, 또는 사면이 숙연한 깊은 밤인데 「춘향가」 중 옥중가의 귀성을 발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창거창래(唱去唱來) 소리가 진경에 들어가매, 음풍이 슬슬 돌면서 수십 대의 촛불이 일시에 탁 꺼지고 반공에서 귀곡성이 은은히 나는 듯하였다. 청중은 모두들 아울러 그 신기에 무불감탄(無不感歎)하였다고 전한다.”고 적고 있는데 당시 진주에서 활동하는 소리꾼들의 활동상이나 공연하는 모습을 능히 상상할 수가 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사학자 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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