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소리의 명창]

교방이 해체되고 기생조합 권번이 결성된 진주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소리광대로 이름을 날리던 이선유(李善有)와 유성준(劉成俊)이 연이어 진주에 머물며 권번장을 지내면서 진주의 소리는 그 명성을 드날렸다. 특히 풍광 좋은 촉석루와 진주좌[이후 진주극장이었다가 현재는 몰에이지 복합상가가 되었음]는 이름난 공연장이었다. 이름난 공연장과 많은 청중으로 인하여 전국의 이름난 소리광대들이 이곳 진주에서 공연을 하였던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이선유: 이선유는 거금 67전에 경상도 진주군에서 출생하였다. 10여세부터 소리공부를 시작하여 15세시에 송우룡(宋雨龍) 문하에 이르러 3년간 훈도를 받은 후 독공으로 계속하다가 김세종의 지침을 받았으며 김창환(金昌煥)·박기홍(朴基洪) 등 선배를 종유하여 실제 견문을 넓혀 소리는 완역에 달하게 되었다. 그 후 경향 간을 다니면서 명성을 떨쳤고 기량은 더욱 숙달하여졌다. 지금은 고향 진주에서 후진을 양성하기에 힘을 쓰고 있다 한다. 1939년까지 진주권번의 권번장으로 있었는데, 이때 이선유에게서 소리를 배운 사람은 신숙·박봉술·김수악·이윤례·오비취 등이었다. 진주에는 1949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유성준: 유성준[1874?~1949]은 근대 5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송흥록-송광록-송우룡-유성준-(임방울, 김연수, 정광수, 박동진)으로 이어지는 동편제소리의 계보를 잇고 있다. 『조선창극사』에는 “유성준은 전라북도 남원 출생이다. 송우룡의 제자로서 고종시대에 정춘풍(鄭春風)·김세종(金世宗)의 지침을 받아서 견문이 매우 높은 명창이다. 지금 70노령으로 오히려 건재하여 진주에서 군소배의 교도에 힘을 쓰고 있으니 ‘학불염 교불권(배움을 싫어하지 않고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學不厭 敎不倦)’이 그의 일생의 책무인가 한다.

○이종기: 이종기(예명 : 동백)는 김성옥-김정근-이종기-강창원으로 이어지는 중고제소리의 명창이다. 『조선창극사』의 기록에 의하면, “74년 전에 충청남도 비인군 도만리에서 출생하였다. (중략) 김정근(金定根) 문하에 가서 판소리 공부하기를 시작하였다. 수학한 후에 김세종(金世宗) 문장(門墻)에 이르러 얼마 동안 도야를 받아서 비로소 방향을 알게 되었다. (중략) 후에 진주 이곡사에 가서 3년간 연마하였다. 35, 6세경에 창원읍내로 가서 이후 9년간 거주하였는데 성명이 원근에 쟁쟁하게 되었다.(후략)”

[현황]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진주에는 이름난 소리광대들이 공연을 하고 또 머물면서 소리공부를 하고 가르치는 활동의 주 무대였으나 일제강점 말기에 들어서면서 사회변화와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인하여 전통소리는 점차 그 흥미를 잃어가게 되고 마침내 국가적인 차원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쇠퇴하여졌다. 진주지역은 진주권번을 통하여 배우고 익혔던 기생들이 소리보다는 무용에 뜻을 두어 2011년 현재 10개의 무형문화재 중 4종목이 춤이다. 당시 진주권번 출신인 김수악만이 구음을 구사하여, 판소리는 아니지만 근근히 소리의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근년에는 진주 출신의 고춘자가 전주대사습에서 판소리로 대상을 차지하여 이곳 경상남도의 소리고장인 진주에서 그 맥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사학자 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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