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年斷想-隨筆
논설위원 하영갑

필자가 대문과 이별 한지는 벌써 16년이나 되었다. 어릴 때 대문은 아버지가 대나무를 쪼개어 만든 사립문이었고, 성장한 이후로는 초록색 철대문과 함께했던 세월이었다. 결혼 이전에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여닫았던 대문과의 대화는 대부분 힘들었던 하루 이야기였을 것이다. 무겁고 무거웠던 우리 집 사립문. 봄이면 논 · 밭농사에 매달리면서 왕래하는 일꾼들의 잡다한 이야기와 진종일 가사에 찌들어 힘겹게 움직이다가 잠시 짬을 타, 마루 끝 한편에 기대어 깜빡 잠에 빠진 젊은 소녀나 새댁의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의 특성상 원거리 행보에 하루를 쏟아 붓고 기진맥진하여 아랫마을 입구 주점에서 막걸리로 허기진 배를 대충 채우고 귀가하는 모습을 사립문은 보고 마음 졸였을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초겨울이 되면 농촌은 농한기가 되어 내년 농사준비 외에는 딱히 할 만 한 일이 없었다. 하루에 한 짐 밖에 할 수 없는 땔 나무를 하기 위해 먼 거리까지 도시락 싸서 가기도 하고, 밤이면 품앗이로 여럿이 모여 새끼를 꼬기도 하며, 어느 집 사랑방이나 마을 주점에서 놀음으로 날밤을 새우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 년 내내 노력해 번 돈으로 논이나 밭, 어떤 해에는 큰 산을 사기도 했다. 계약금과 중도금 그리고 잔금을 치루는 날이면 그동안 힘겨웠던 심신을 부여잡고 밤늦게 귀가하면서 사립문을 번쩍 들어 열며 이야기 하신다.

“야야! 니가 그동안 집을 잘 지켜 줘서 고맙다. 오늘 논 한 도가리 샀다” 하시며 큰기침과 함께 닫고 들어오시는 날이 더러 있었다. 당시 사립문은 아버지에게 아마 이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주인어른 정말 수고 하셨소. 그 많은 식구에 머리 아픈 가정을 잘 다스려 이렇게 재산을 일구었으니 말이오. 늘 애처롭고 안타까운 모습만 보아 오다가 오늘은 나도 참 기분 좋은 날이라오.”라고.

우리가 어디에 살든 힘들고 아픈 과거를 딛고 자수성가한 사업가. 수많은 우등생과 수재들 속 어려운 경쟁에서 이겨 취득한 고등직업 등극자. 고위직 공무원이나 특수 직업 수뇌들. 하고 많은 직업에 각각 소속된 작은 분신들이 살아 있는 한 말 없이 지켜보고 있어 거리낌 없이 손잡고 다가서는 대상. 그가 바로 나고 드는 현관문이다. 늘 무던한 그에게 우리는 관심 가져 본 일이 있는가? 하루하루가 힘들어 곤욕스럽게 살고 있는 가족을 위해 팔다리 허리가 늘어지도록 진종일 수고 한 시간이 끝나는 퇴근길. 말 없이 지켜 본 현관문은 그대에게 뜨거운 미소를 보냈을 것이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다.”고.

큰 돈 벌어보겠다고 순진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허황된 꿈과 가상현실을 늘어진 침으로 그려가며 하루하루를 거품 속에 살아가고, 조잡한 입발림과 아부로 얼마 가지 않는 짜릿한 일생의 한 순간을 맛보기 위해 진실을 깔고 앉아 남을 헐뜯어 짓밟고 올라 선 그 자리. 돈과 권세를 이용해 정말 보잘 것 없는 추한 즐거움을 취하기 위하여 상대방과 이웃을 기만하고, 심지어는 가족까지 심신에 큰 손상을 입혀가며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기생충보다 못한 인간들아!

빈약한 환경을 극복할 힘이 없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어렵 살이 이웃과 욕심 없고 사심 없이 진실과 근면의 작업복차림으로 살아가는 평민들의 포근한 작은 미소와 가슴에 멍들이지 말라. 백성을 속이고, 부모형제를 속이고 배우자와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 있어도 아침저녁 시시 때때로 나고 드는 순간순간 가장 가까이서 진솔한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현관문은 속일 수 없으니. 그대의 추하고 부끄럽지 않는 말과 행동을 남김없이 보여 주기 바란다. 얼마 되지 않는 인생살이 진정 어렵고 힘들거든 무거운 마음 모두 내려놓고 빈 가슴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렴. 꾸밈없이 지켜보고 숨 쉬게 하는 하늘과 터땅 그리고 바다와 그대들의 후손이 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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