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

황석역사연구소장 박선호

그러나 이순신장군이 존재하는 한 조선은 점령하기 어렵다, 라고 판단한 풍신수길은 고니시유가나가와 요시라를 비롯한 일본간첩들과 조선조정 대신들에 대한 뇌물과 이간전술로 싸우지 않고도 이순신을 제거하는 참수작전에 성공함으로써 조선은 완전히 풍전등화가 되었다.

일본군은 공격할 황석산성과 남원읍성에 대한 충분한 사전연구를 통하여 성(城)이 내륙오지이며 높고도 험난한 요새 황석산성에는 모리데루모도 히로시마성주를 대장으로 지상군 75,300명을 편성하고, 바닷길이고 섬진강을 거쳐 접근이 용이하며 평야지대로 공격하기가 수월한 남원읍성에는 육군 45,800명과 출동한 일본수군 7,200명중 6천명을 붙여 51,800 여명의 공격군을 편성했다.

황석산성에는 관으로부터 식량이나 장비나 무기 등의 지원이 전혀 없는 전투에서 군인으로서는 오합지졸인 부녀자, 노약자, 농민, 사냥꾼, 등 7천여 명의 백성들과 안음현감 곽준과 함양현감 조종도, 거창좌수요 군무장인 유명개, 안음현인 정유영형제, 유세홍, 옥녀부인 등이 분전하여 7만5천3백명의 일본우군 중 48,300명이 사라질 정도로 완벽하게 궤멸을 시켰으며 이들 중 반은 전사자였고 반은 부상자였다. 조총은 1분당 한발을 쏘지만 활은 수십 발을 쏠 수가 있으니 백사림이 성문을 열어주는 18일 새벽까지 일본군은 한 번도 성내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인해전술을 시작한 16일 밤부터 일본군이 스스로 무너진 동료들의 코베기는 일본군끼리 벌이는 전투장을 곳곳에 만들었으며 서하면 우전마을의 개울과 하천은 일본군들의 붉은 피로 넘쳤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을 잘 아는, 1900년대에 조선에 다시 돌아온 일본군은 75,300명 중 70%이상이 사라진 사실을 지우기 위하여 “경남거창까지는 75,300이 왔으나 중간 목표인 황석산성의 코앞인 거창에서 재편성을 하여 본대는 황석산성을 지나쳐서 진안과 장수로 갔고 일부는 운봉, 남원에서 식량을 약탈했다,”라고 하면서 모리데루모도 대장은 유군 즉, 떠돌이 유령이 되었다라고 하면서 황석산성전투 참전일본군을 27,000명으로 축소 조작했다. 거창에서 사라진 그들은, 모리데루모도의 집사 깃가와히로이에이가 전주성에서 낸 코베기보고서로, 부상자들이 게이넨의 전주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음을 증명했고 좌군대장 우기다히데이에의 북진 후 전남북 주둔지 편성표에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가 지휘권을 상실한 채, “장성군진원현과 나주현에 등장”함으로써 <거창에서의 재편성은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로써 황석산성에 참전한 왜군은 75,300명이라는 사실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당신이 아직도 신라, 백제, 고구려가 대륙을 누빈 자랑스러운 조상들이 아니라고 믿거나 mystery 라는 애매한 용어를 붙여서 아메리카의 인디언이나 잉카인들이 전염병으로 죽었다라고 주장하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황인종을 쓸어내고 세계 인종의 재편성을 기도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그대로 믿거나, 자연조건과 문화적 열등감으로 코를 베고 난도질을 하며 수차례나 조선인의 말살을 기도했고 오늘날까지 그 버릇이 고착 종족화 된 일본인들이 조작한 반도사관을 믿는 그 정도의 수준이라면 그는 잃어버린 역사를 더 이상 논할 대상이 아닌 얼빠진 역사적 미아, 떠돌이다.

한때의 성적표나 학위가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과 지속적인 궁리와 실천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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