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층으로서 전국에 걸쳐 독립운동을 전개한 강달영 선생은 진주의 자랑이었다. 사진제공=추호석

본지는 이번 호부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진주항일운동 역사를 전문가의 시선으로 하나씩 되짚어나갈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 편집자주

강달영(1888~1940) 선생은 1968년에 건국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분이다. 진주시 비봉동에서 태어나 진주시 동성동 129번지에 거주했다.

강 선생은 1919년 3월18-19일 양일간 진주 3.1운동이 전개될 때 2만 수 천 명 군중을 지도하며 시위하다 일경에 체포돼 진주에서 재판을 받고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3년 징역형이 확정되어 대구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진주 3.1운동(항일독립운동)은 3월10일 각처에 격문이 나붙기 시작해 엄중한 경계로 검문검색이 강화되던 때 전파됐다. 때문에 조용한 시골이었던 집현면 하촌리 김재화 자택에서 비밀회합을 가지고 교유문을 작성, 세밀한 투쟁계획을 세우게 된다. 강 선생의 직업은 대서인이라 했으니 당시로는 상당한 지식층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강달영 선생은 김재화, 박진환 선생 등과 함께 진주시내 각 사회단체를 찾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포섭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3월18일 낮 12시에 약속한대로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하니 시내 다섯 곳에서 동시다발로 시위가 전개되었고 일경은 혼비백산했다.

군중들은 도청으로 진격하자고 외쳤고, 너도나도 진주성 영남포정사 앞으로 나아가 늘어난 군중은 3만 명을 육박해 가히 거대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만 2년 만에 출옥한 강달영 선생은 1922년 2월경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여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 설립을 위해 애쓰고, 개회사 발기인으로 설립비용을 부담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열성이었다. 강 선생은 내친김에 소작 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금산면, 집현면, 일반성면, 도동면 등에 지회와 출장소를 설립해 운동 범위를 사천시 곤양면, 서포면까지 확산시켜 나갔다. 또 같은 해 9월4일엔 진주시 계동 99번지 진주청년회관에서 전국소작노동자 대회를 개최, 주관하니 이는 소작인대회로는 전국 최초 집회로 역사에 기록된다.

1922년 10월 강 선생은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노동연성회에 참가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전국적인 노동활동을 전개하는 시발점에 섰다. 이어 1924년 1월에는 진주에서 열린 경남노동운동간친회를 주도하고 같은 해 4월에는 조선노동총동맹 창립대회에 참여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또한 그해 가을 10월에는 사상단체인 화요회에 가입하는 등 강달영 선생은 활동범위를 점점 넓혀 나갔다.

화요회라는 단체는 신사상연구회가 개칭돼 설립된 사회 단체로 최초 구연흠, 박일병, 홍명희 등이 발기하여 60여명 회원을 두었다. 단체의 목적은 학술연구로서 강습과 토론회를 개최하고 서적과 잡지를 발간하는 일을 하기로 정했다. 

이처럼 지식층에 속해 전국에서 활동한 강달영 선생은 진주의 자랑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등에 보도된 강 선생의 활동상은 그 뜨거운 애국애족심을 전하고 있다.

 

추 호 석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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