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박종범

고종(재위 1863∼1907)처럼 통치에 어려움을 많이 겪은 지도자도 익히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국제사회의 개념이 희박했던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다. 고종이 이끄는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민비의 어설픈 개화정책을 겪으며 수구와 개화가 대립하는 가운데 제국주의의 국제사회를 만났다. 고종은 나라를 잃는 순간에야 비로소 영국공사를 소환하여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를 용인하는 제2차 영‧일 동맹(1905.8)에 항의하고, 미‧일 간 상호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용인하는 가스라-테프트 밀약이 체결(1905.7)된 후에야 그해 11월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루우트(E. Root) 미 국무장관에게 대일본 억제를 요구했으며, 급기야 1907년 6월 헤이그 개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밀사로 보내 일제의 침략을 규탄했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아둔한 이러한 외교는 열강들의 제국주의 성격을 간과한 것으로서 현실적으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국제사회에서 주권을 지키는 수단이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 등 국가의 하드파워임을 당시 순진했던 대한제국이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이 겪은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다. 21세기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제국주의가 아니라 강대국의 패권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패권 경쟁시대에서 국가의 파워란 과학기술과 경제력, 군사력, 외교력 등으로서 파워가 약한 나라가 국가의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동맹을 활용하는 외교력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이를 꿰뚫어 보았으며, 6.25 전쟁과 폐허가 된 한국에서 외교력을 발휘하여 한‧미 동맹으로 우리의 주권을 지탱하면서 오늘날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운 밑거름을 깔았던 것이다. 고종 이후 한 세기를 훌쩍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되었어도 상대적인 파워는 미약하며 강대국의 패권주의 싸움 권에 둘러싸여 있다. 경제력만으로는 부족하여 군사력과 외교력을 키워야 홀대 당하지 않겠지만 북한의 남침 의지가 아예 없는 듯이 북한의 선의만 바라보며 스스로 군사력을 해체시키고 외골수 외교를 펼치며 중‧러에 기대어 남북한의 통합을 의미하는 ‘민족’만 강조하고 있다면 이는 자멸의 의지로 볼 수밖에 없다. 현실인식이 부족한 것인지는 모르나 아마도 우리 민족이 100여 년 전에 겪었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체득한 국가의 하드파워의 중요성을 잊은 듯하다. 적성국가인 중‧러는 2019년만 해도 4차례나 대한민국의 항공비행정보구역(KADIZ)에서 항공훈련을 하였다. 주권 무시가 자행되고 있는데도 이를 감추기라도 하듯 이 정권은 해당국에 주권 침해를 지적하는 항의조차하지 않고 오히려 국민들을 설득하거나 숨기려고 애쓰고 있다. 이것이 21세기를 맞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정세는 엄연히 냉전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냉전을 마치 지나간 과거의 일로 치부하며 ‘평화’ 타령에 기를 쓰고 있다. 과거 영국의 체임벌린 정부는 히틀러가 전쟁을 준비하며 오스트리아를 합병(1938.3)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1939.3)하는 등의 침략행위를 하는 데도 평화만을 강조하며 유화정책을 거듭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막지 못했다. 만약 히틀러의 전쟁준비를 지적하고 경각심을 고취하였다면 세계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로 볼 때, 21세기 한반도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항공 훈련이 한국 영공에서 자행되고 핵무기를 앞세운 북한의 대남 적대의식이 날로 고조되고 있는데도 유화정책으로 평화만 강조하고 있다면 대한민국의 장래는 어둡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이다. 100여 년 전의 고종이나 지금의 문재인 정권은 시대적 환경은 다르지만 국가의 하드파워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 같다. 북한의 대남전략정책인 ‘우리민족끼리’ 정신에 사로잡혀 방향성 없이 ‘민족’만 찾고 있다가는 우리 민족이 공산체제 속으로 인도될 가능성이 크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의 민족정신은 찾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민족을 어느 체제로 끌고 가느냐 하는 것은 주로 지도자의 의지에 달려있어 우려심이 발동되는 것은 지나친 기우가 아니다. 대표적인 진보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도 문 대통령의 3.1절 100주년 기념사에 대해 “관제 민족주의의 전형적 모습”이라며 “청산을 모토로 하는 개혁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지 극히 부정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국민들이 정신 차려야 한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가장 견고한 자유민주주의 세력으로 수적으로 많고 사회적으로 가장 유기적인 존재이지만 흩어져 단합이 안 되고 있으며, 그 영향력 또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움직여야 민족이 지켜진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소속 그룹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능력만큼 적극적이고 통합적으로 움직여 진정한 민족정신을 살려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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