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역사문화찾기] 진주 최고의 선비이자 대학자, 성여신
[진주역사문화찾기] 진주 최고의 선비이자 대학자, 성여신
  • 강신웅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1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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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사 정리한 ‘진양지’ 편찬

남명의 충절정신, 구암의 애민정신을 본받다
고장 풍속교화시키려 ‘동약’만든 부사성여신
부사 성여신 선생 주도로 편찬한 ‘진양지’. ‘진양지’는 진주지역사를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평가된 거의 유일한 책이다.
부사 성여신 선생 주도로 편찬한 ‘진양지’. ‘진양지’는 진주지역사를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평가된 거의 유일한 책이다.

요즈음 같은 제4차 산업혁명 시기에 발맞춰 각 지방에서는 그들 고유한 역사·문화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지역이 정확한 역사자료의 부족으로 열정만큼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실정은 진주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우리 진주는 1300여 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가졌다고 자랑을 하지만 그 긴 역사만큼 매우 산만하고 와전된 역사기록들이 너무 많다. 이러한 현실은 그간 우리 지역 몇몇 뜻있는 향토사학가나 역사학자들이 진주에 대해 올바른 역사정리를 하려는 의욕과 노력에 크나큰 장해가 되어 왔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지역과는 달리 진주 지역에는 부사, 성여신(浮査, 成汝信) 같은 선대의 훌륭한 선비이자 대학자가 있었음에 오늘날 진주의 정체성 확립의 본질인 진주문화·역사의 올바른 연구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때문에 이번 글에선 작금 지극히 산만하고 혼란한 진주지역사를 그나마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검정 평가된 ‘진양지(晉陽志)’, 그리고 그 ‘진양지’를 편찬한 부사 성여신이라는 인물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학자로서 느끼는 바, 그나마 ‘진양지’라는 책이 남아있어 긴 세월 지역사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들에겐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양지’는 향후 정확하고 바른 지역사를 공부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부사 성여신. 진주 최고의 선비이자 대학자였던 사람. 그를 만나러 가보자.

부사, 성여신 선생은 1546년 진주시 금산면의 선비집안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조계(槽溪) 신점(申霑)에게 나아가 공부를 했는데, 신점은 신숙주(申叔舟)의 증손으로 부사의 이모부가 된다. 

금산면 가방리 남성마을에 위치한 부사정. 부사정은 선조 33년(1600)에 부사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제자와 유림들이 지은 부사정사(浮査精舍)에 속한 정자다. 사진=박청기자
금산면 가방리 남성마을에 위치한 부사정. 부사정은 선조 33년(1600)에 부사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제자와 유림들이 지은 부사정사(浮査精舍)에 속한 정자다. 사진=박청기자

부사 성여신은 15세 때 약포(藥圃) 정탁(鄭琢)에게 상서(尙書)를 배웠다. 사천의 구암(龜巖) 이정(李禎)은 18세 때 부사를 보고 “나라의 인재가 될 것”이라 기대하며 ‘근사록(近思錄)’을 주면서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에 힘쓰게 했다. 23세 땐 진주 관찰사가 유생 10여명을 뽑아 지리산 단속사에서 공부를 시켰는데, 성여신이 그 중 으뜸이었다고 한다. 그는 부모가 돌아가시고 연이어 6년을 시묘살이 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고, 31세 때 덕천서원(德川書院) 건립을 도왔다. 36세 땐 처가가 있는 의령 가례로 이사해 곽재우 등과 교유하며 자굴산에서 학문을 연마하기도 했다. 정유재란 땐 둘째 아들과 함께 곽재우가 이끄는 화왕산성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54세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부사정과 반구정(伴鷗亭)을 지었다.

성여신 선생은 이때부터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황폐해진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향약을 실시했다. 예를 복구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게 된 것이다.

성 선생 64세 때엔 가을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선발을 주관하는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했는데, 월사는 “집밖으로 서너 걸음도 나가지도 않았는데 강산 천만리가 다 보이네”라는 부사의 글을 읽고 ‘노련하고 숙련된 선비로서 시속의 풍격을 본받지 않는 자’라고 여겨 발탁했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4년 뒤 별시 동당에 장원한 성 선생이 서울에 가는 길이었는데, 객사 관인이 부사에게 정당한 방법이 아닌 쉽게 급제하는 방법을 이야기하자 “임금을 섬기려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는 것이 옳은가? 내가 과업을 늙도록 폐하지 않은 것은 어버이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평소 포부를 한번 펴 보고자 한 것인데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세도를 알겠구나. 하물며 시사가 바르지 못하고 삼강(三綱)이 장차 땅에 떨어지려고 하는데, 과거는 해서 무엇하리요”하고는 그만 돌아왔다. 그 후 은둔할 것을 결심하고 세상을 마칠 때까지 산수 유람을 즐거움으로 삼았는데, 특히 두류산(지리산)을 유람하길 좋아해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남기기도 했다. 

부사 성 선생 사적비. 1983년 건립됐다. 가로 175㎝, 세로 64㎝, 폭 33㎝ 크기로 부사정 양직문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진=박청기자
부사 성 선생 사적비. 1983년 건립됐다. 가로 175㎝, 세로 64㎝, 폭 33㎝ 크기로 부사정 양직문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진=박청기자

71세 때 성 선생은 봄에는 금산면에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받아 이를 보완해 금산동약(琴山洞約)을 시행했고,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의 규범을 본받아 양몽(養蒙)지학(志學)의 두 서재(書齋)를 세워 고을의 후생들을 가르쳤다. 74세 때 ‘진양전성기급상락군김공시민각적비명(晉陽全城記及上洛君金公時敏卻敵碑銘)’을 지었고, 77세 때 인근 선비들과 그 유명한 ‘진양지(晉陽誌)’를 편찬했다. ‘진양지’는 당시 생활과 사회·경제 활동 및 인물들에 대한 유용한 자료를 담고 있으며, 당대의 남명 문인과 학통을 살피는데 다양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명 관계 연구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임종 전날 자손들에게 “남명 선생이 임종시 문인들에게 치상예의(治喪禮儀)를 주시고, 집안을 경계해 안정시키셨으니, 군자가 살고 죽을 때 편안하고 한가롭기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다음날 “내 자리를 바로 하라”하고 좌정한 채로 임종했는데 향년 87세였다.

부사 성여신은 남명의 경의 정신과 구암의 애민 정신을 전수받아 이를 자신의 학문성향으로 만들었다. 또한 고장의 풍속을 교화시키려 ‘동약’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진주의 역사·문화·인물 등을 총망라한 ‘진양지’를 편찬한 조선중기 진주의 대표 선비라고 할 수 있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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