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斷想

논설위원 하영갑

쌀랑한 초 겨울하늘 푸르디푸름에 마음까지 맑아진다. 세상 나와 거울을 모르고 지낸 날은 엄마가 거울이었고. 거울이 보일 때는 꽃 피는 사춘기가 시작이었으니, 때로는 내 얼굴이 잘 보이고 못 보일 때를 가리지 않고 먹는 것과 자는 것 때문에 다투기도 했네.

“못 먹어서 핀 버짐이라고? 그 버짐 때문에 밉게 보인다고?” 막 피는 꽃에는 이슬도 머물기를 미안해 할 것을. 이제 막 젖 냄새 털고 일어나 노랑 털 뽀송뽀송 난 얼굴로 걷는 청년의 걸음 씩씩하기만 했지 무슨 무게가 있겠으며 올바른 목적지가 있겠는가.

봄꽃과 가을 열매 가득한 드넓은 정원의 푸른 꿈은 시침(時針)에 찔려 검붉게 타버렸고, 부서지는 파도 위 종이학의 어설픈 춤사위는 돌고래의 아가리에 먹히고 말았네.

저 넓고 깊은 바다를 젊은 철부지가 건너자면 세차게 부는 바람이 방파제 옆 부둣가 반바지 차림에 하얀 운동화 차림으로 서 있는 멋진 청춘을 보고 놀라 쓰러져 의식이 없을 때 작은 조각배라도 타고 건널 생각을 할 텐데 그 바람 쓰러지지도 않으니.

개나리 진달래 장미의 미소를 타고 벌 나비의 속삭임이 그리워 통통했던 어느 겨울 바람 부는 해질녘. 소죽 솥 뚜껑에 걸린 눈물을 부지깽이로 끄집어 내렸던 세월도 자글자글 산비탈 꼬부랑 밭골이 되고 말았네. 그저 보는 것이라곤 멀리서 막걸리 주전자에 고구마 삶아 머리에 이고 드는 새참 심부름꾼의 얼굴밖에 없었으니 본 것 없는 촌뜨기 한심하기 그지없지.

“바깥세상 구경하는 망원경이라도 있었으면...”

일상의 기분에 끌려 자신의 검은 얼굴을 한탄하며 목에 두른 작은 스카프만 매었다 풀었다 하며 애꿎은 부모님의 그림자까지 떠올리고 찹쌀 한 되 콩 한 되로 바꾸었던 화장품과 싸우기도 한 날들이 얼마였던가.

“한 되를 한 말(斗)로 바꿨으면 얼마나 좋은 화장품을 샀을꼬?”

깊고 얕은 밭이랑 위에 질서 없이 모이는 검은 달과 별들이 입 모아 말 한다. 질퍽하게 지나온 과거를 후회하고 가리고 지우는 것도 이젠 소용없으니, 아픈 마음 내려놓고 조용히 받아들여 멈추고 앞으로 써야할 가면의 이름이나 지어 놓게. 이것이 그대의 꽉 찬 삶이었고 지금껏 살아오며 해 온 일이었으니.

내일이면 또 그놈의 일은 소리치고 나타날 것들이기에 무서워하지도 나무라지도 말게.

“계속 잔소리 할래? 레이저기로 콱! 지지기 전에 조용히 좀 해라.”

말 많고 탈 많았던 지난날들 엄격히 열어놓고 보면 모두가 자신이 태어 나 있었기에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었고, 살아 있기에 좋고 나쁘고 억울하고 가슴아파했던 일과 문제들이 아니었던가. 캄캄한 겨울 밤 살을 에는 듯 한 바람사이로 들리는 소리는 무슨 소리일꼬?

“암탉이 낮에 낳아 놓은 알 잃어버린 줄 알아도 모른 척하고 내일 또 낳는 것처럼 그저 지나 가렴아.”

어둠 속 거울이 있어도 볼 수 없지만, 없어도 보이는 자신의 모습은 자고 보나 깨고 보나 느낌이 있는 거기에 내가 있기에 진정한 내 모습 순진하고 착한 그 모습 한 번 더 떠 올려 그려봄은 어떤가. 투덜대거나 안타까워 할 필요도 없는 세월의 넋, 이제 맑은 그 거울 속에서 곧 사라질 그 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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