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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한밤중에 폭풍우를 만나 토굴 속에 묵게 된 원효, 심한 갈증에 잠에서 깨어나 어둠 속에서 고인물을 찾아 달게 마시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깨어 보니 간밤에 마신 물은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 구역질을 하던 원효는 문득 깨달았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구나’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중국유학 길을 되돌렸고 의상 홀로 당나라로 건너갔다. 이것이 유명한 원효의 오도(悟道), 즉 깨달음 장면이다. 원효가 해골 물인 촉루수(髑髏水)를 마신 오도의 장면은 우리 역사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설화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원효행장》 최치원의《의상전》에도 확인할 길이 없다. 중국의 문헌 961년《종경록》, 988년《송 고승전》, 1107년《임간록》의 내용에는 해골물이 아니라 시체 썩은 물, 장소가 신라 땅, 당나라 땅으로, 원효와 의상이 아니라 원효 혼자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속성이 설(薛)씨인 원효는 오도 설화 말고는 요석공주(태종무열왕 딸)와의 사이에 아들 설총을 낳았다. 617년 진평왕 39년에 태어나 686년 신문왕 6년에 70세에 입적했다. 선덕여왕, 태종무열왕, 김유신, 문무왕, 신문왕 등이 동시대의 인물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46 열전6 설총 편에 『원효의 손자요 설총의 아들인 설중업은 혜공왕 15년(779)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일본의 황족인 진인(眞人)으로부터 원효를 칭송하는 시를 받아왔다.』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을 읽고 그 사람을 보지 못한 것을 깊이 한탄했는데, 신라국 사신 설 씨가 거사의 손자라는 것을 듣고 기뻐서 이에 시를 지어드린다.”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원효대사는 신라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명성과 불교교단의 고승으로 추앙받았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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