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바로알기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 뒤, 귀국길에 목화씨를 몰래 붓두껍에 넣어 갖고 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목화씨는 몰래 붓두껍에 숨겨 들여온 것도, 국외반출 금지 품목도 아니었다. 더욱이 문익점은 강남 지방에 귀양살이한 적도 없다.

《고려사》<열전 문익점전>을 보면 문익점이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얻어 갖고 와 장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었다. 처음에는 재배 방법을 몰라 거의 다 말라버리고 한 그루만 남았는데 세 해 만에 크게 불었다.

《태조실록》에는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 조정에 갔다가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씨 10여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이 원나라 승려 홍원에게 실 뽑고 베 짜는 법을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태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세조실록》《신중동국여지승람》 등에도 귀양살이는 없으며, 붓두껍이 아니라 ‘얻어 갖고’‘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되어 있다.

1795년 《청정관전서〚<양엽기>에는 “세상에 전하기로는 문익점이 초면의 종자를 얻어 상투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왔는데, 그 아들 ‘문내’가 비로소 방차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풍속에 방차를 ‘물레’라 한다. 그리고 그 아들 ‘문영’이 비로소 베틀을 만들어 베를 짰다. 그러므로 면포를 ‘문영’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문래는 문익점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이며, 문영과는 형제이다.

그러면 [중국 강남 귀양살이, 주머니, 상투 속, 붓두껍, 장인의 베짜기] 등의 이야기는 어느 쪽이 맞을까?

1819년 남평 문 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에 “덕흥군을 따라 귀국하라는 원 순제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강남지방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나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면 밭을 보고 종자(從者) 김룡(金龍)으로 하여금 목화씨를 따게 하여 몰래 필관(筆管-붓두껍)에 넣어 가지고 왔다”고 문중에서 기록했다.

어느 쪽이든 의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준 문익점에게서 높이 살점은 공직자의 ‘애민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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