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
                        강신웅 교수

<본 고는 대구자수박물관 정재환관장이 30여 년 전에 백병풍(白屛風)에서 발굴, 소장해온 국내의 희귀 고문헌자료로서, 조선조 인조2년(1624) 일본에 수신사(修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계영(辛啓榮 1577∼1669)이 그 어떤 정사(正史)에서도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당대의 신빙성 있는 역사고사(歷史故事)를 한자(漢子)원문으로 기록된 고문서를 필자가 직접 국역(國譯)한 자료이다.>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4)

11월이 되자 가등청정이 먼저 스스로 몰래 달아났고, 소서행장은 유정이 쫓아와 죽일까 걱정이 되고, 공과 진린(陳璘)이 자기들의 귀로를 차단할까 두려워, 몰래 석만자에게 연락하여 병사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구출하여 함께 달아나자고 약속하였다. 공과 진린이 왜적의 상황을 앉아서 헤아려 보니, 싸울 준비를 하는 데 며칠이 걸릴 것 같았다. 석만자를 보니 병사들을 모두 데리고 바다를 가리며 당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분화법(噴火法 : 불을 뿜는 전술)을 쓰자 우리나라 군대가 종횡압살법(縱橫壓殺法 : 이리저리 다니며 눌러 죽이는 전술)을 썼다.

종일토록 크게 싸웠는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적의 배가 온통 뜨거운 화염에 휩싸이고, 벼락이 적진을 부스는 것뿐이었다. 석만자는 어지럽게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중에 죽었고, 소서행장은 작은 조각배를 타고 달아났다. 바로 이것이 캄캄한 산중에 번개가 치는 사이에 모용(慕容)의 채찍 하나를 부러뜨리는 것이고, 적벽(赤壁)에서 화공(火攻)을 하여 위만(魏瞞)의 1천 척 조각배를 불태워 없애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탄환 한 발이 공의 철갑을 뚫고 들어와 공의 가슴에 박혔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처럼 열사(烈士)가 운명하였다. 큰 바다가 아무리 맑다 해도 용양(龍驤)이 이미 떠나 버리니, 만인이 비 오듯 눈물을 흘리고, 백령(百靈)이 바람결에 울부짖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을 잊고, 산이 무너지는 아픔을 품었다.

진린이 그 소식을 듣고 배 한 척을 타고 와서 시신을 쓰다듬으며 오래 애통해 하면서 말하기를,

“나와 공은 각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태어나, 전쟁터에서 서로 만났는데, 마음이 같고 기운이 합하여 한결같이 마음과 힘을 써서 만 리 먼 길에 오랑캐를 정벌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이 공적을 세운 사람이 누구인가?

나는 무슨 힘이 있었는가?

이제 공이 이루어졌는데 공은 불행하게 되었고, 전쟁이 끝났는데 나만 홀로 살아 있으니, 왜복(倭伏)의 이치를 궁구하기 어렵고, 생사로 갈린 슬픔이 어찌 끝나겠는가?”

라고 하고는, 부의(賻儀)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호남 쪽에서는 아무리 심산궁곡의 어리석은 남자와 여자들이라도 울며 부르짖으며 서로 위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장계(狀啓)가 도성에 이르자 임금이 몹시 슬퍼하면서 예관(禮官)을 보내 제문(祭文)을 하사하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상례와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실정에 맞게 준비하게 하였다.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그 밖에 여러 직책을 겸하였다. 그 해 12월에 아산(牙山) 선영에 돌아가 장례를 치렀는데, 도처에서 온 조문객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상여를 부여잡고 제사를 지내니, 영구가 출발하여 하루에 10리 도 가지 못하였다.

순천(順天) 바닷가에 충민사(忠愍祠)를 창립하니, 사시사철 향불이 타올라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는다. 선무공신(宣武功臣) 제1등으로 책봉되었다.

아! 공의 공적은 사직을 지킨 데 있고, 공의 명성은 후세에 전해졌다.

왜인들은 그가 전쟁을 잘 하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였고, 명나라 장수는 그의 일과 공적이 탁월하여 옛날 명장의 풍도가 있는 것에 탄복하였다.

중국의 영웅들도 그보다 더 나을 수가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 중에 드러난 사람들과 비교해 본다면, 신라 이후로는 김유신(金庾信)과 을지문덕(乙支文德), 강감찬(姜邯贊) 세 사람이 있을 뿐이다.

(다음 호에서도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에 대해서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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