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기 논개의 진실과 왜곡 Ⅱ

연구위원 松園 최판도경남향토사연구회
연구위원 松園 최판도경남향토사연구회

역사는 진실의 기록이다.

논개라는 인물이 역사적 인물이라면 기록이 진실이어야 하고, 진실된 기록은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진주의 이야기와 호남의 이야기가 다른데 어찌 진실이라 할 수 있겠는가?

논개의 역사적 기록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이 최초의 기록이다. 의기 논개의 거룩한 뜻을 기리는 것은 바른 역사의 기록 위에서 논개를 추모함이 본뜻이라 생각하며 논개의 진실과 왜곡에 대하여 연재로 서술하고자 한다.

1. 朝鮮의 妓生과 관기의 유래

조선 기생의 그 원류는 신라24대 진흥왕 때 “여무적(女巫的) 직능의 유녀화(遊女化)에 따른 화랑의 원화에서 발생하였다”고도 하고 정약용과 이익은 고려대 때부터 생겼다하여 “백제유기장의 후예인 양수척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의 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시초라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전쟁 포로(捕虜)등 부녀자의 노비(奴婢)화 사노비(私奴婢)의 매음여화(賣淫女化), 천관녀(天官女) 신라시대의 가척(歌尺), 여악(女樂) 제자의 유녀화(遊女花) 등의 예를 추정할 수 있다.

고려 문종 때 팔관 연등회에 여악을 베푼 것이 관기(官妓)의 시초(始初)라고하며 여악(女樂)은 후에 창기희(娼妓戱)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에 와서 많은 관기가 생겨 태조가 개경에서 서울 천도(遷都)할 때 많은 관기(官妓)가 따라 갔다고 함.

조선시대 관기의 목적은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에 있었으며 따라서 관기는 의녀로서도 행세하여 약방기생 또는 상방(尙房)에서 침선(針線) 바느질도 담당하여 상방기생(尙房妓生)이란 이름까지 생겼으나 주로 연회행사(宴會行事) 때 노래와 춤을 맡아 거문고 가야금의 악기(樂器)도 능숙하게 다루었다.

관기는 지방 관아에도 딸려 지방관의 위락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역대의 왕이나 왕족으로 기생을 즐긴 예는 성종, 수양대군, 연산군, 양녕대군, 안평대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기녀의 가무에 있어 지방적 특색으로는 安東妓 誦大學之道 咸興妓의 誦出師表 關東妓의 娼關東別曲, 義州妓의 走馬舞劍 濟州妓의 走馬之妓, 平壤妓의 娼關山 馬詩, 北靑妓의 馳馬之妓, 永興妓의 娼龍飛御天歌 등이 특히 유명하다.

종종 때 사회 풍기(風紀)에 관해서 여러 가지 규제 가운데 의녀 창기의 연회 참여를 금지시킨 일이 있는데 1510년 중종은 크고 작고 간에 연회 할 때 의녀나 창기를 부르는 것을 금하도록 사헌부에 명령하고 節目을 만들도록 하였다.

기생을 관장(管掌)하는 기생청(妓生廳)이 있었는데 가무행의시(歌舞行義詩) 서화(書畵) 를 사족류(士族類)에 함께 가르치면서 춤·노래 또는 풍류로 주연석이나 유흥장에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관기(官妓)·민기(民妓)·약방기생(藥房妓生)·상방기생(尙房妓生) 등 예기(藝妓)의 총칭이었다..

기생의 배출지로는 서울, 평양, 성천, 해주, 강계,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이다. 명기로는 황진이, 매향, 소백주, 의기(義妓)로는 평양의 계월향(桂月香), 진주의 논개(論介- 가산의 홍련(紅蓮)이다.

2000년 이후 장수(長水)가 성역화 되면서 갑자기 부풀려져 논개의 역사적 진실보다는 지역 성역화가 우선하여 잘못 된 내용으로 걷잡을 수없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기생에 관한 역사적 기록과 진주성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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