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壬亂)전후 조선비록(朝鮮秘錄)(19)

 

<본 고는 대구자수박물관 정재환관장이 30여 년 전에 백병풍(白屛風)에서 발굴, 소장해온 국내의 희귀 고문헌자료로서, 조선조 인조2년(1624) 일본에 수신사(修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계영(辛啓榮 1577∼1669)이 그 어떤 정사(正史)에서도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당대의 신빙성 있는 역사고사(歷史故事)를 한자(漢子)원문으로 기록된 고문서를 필자가 직접 국역(國譯)한 자료이다.>

〔 일본견문록(2) 〕

사신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모두 금이나 은으로 된 그릇인데, 은을 주조하여 만든 것 중에는 박계(朴桂 : 약과 같은 음식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릇의 이름으로도 쓰인다.)라는 것은 형태가 크고 위로 붙여서 쌓으면 한 자 남짓에 이른다. 백한(白鷳 : 관상용으로 기르는 새 이름)과 노루를 그 털과 깃을 제거하고 금가루를 마구 뿌려 나무판자에 세워서 밥상 위에 놓아서 제공한다. 도처의 길에 교량이 많았는데, 긴 것은 5리나 10리가 되고, 수십 리에 이르는 것도 있다. 물산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기로는 천하를 통틀어 대적할 자가 없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교묘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모두 품질이 뛰어났다. 그들이 만든 비단 문양을 보면 중국도 미칠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이 만든 조총은 쏘아서 맞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그들이 만든 보검은 간장검(干將劍 :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칼 이름. 10대 명검 중의 하나이다.)을 앞지른다. 문자를 좀 알지만 수준이 매우 낮았다. 만일 문물이 크게 일어나고 또 그들의 괴이한 풍속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중국도 응당 그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다.

상고시대에는 세상이 비고 사람이 없었는데, 진시황이 처음으로 천하의 육국(六國)을 병합하고 불로장생에 뜻이 있어 서시(西市 : ‘서불(徐市)’ 혹은 ‘서복(徐福)’으로도 알려진 사람으로, 진시황 시절에 이름난 방사(方士)이다.)로 하여금 바다에 나가 불사약을 구해 오라고 하였다. 서시가 스스로 생각해 보니, 죽기는 쉬워도 불사약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5백 명씩을 데리고 오곡(五穀)의 종자를 가지고 떠났는데, 대개 떠나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배가 이곳에 당도하자 그 땅에 오곡을 파종하니, 서리가 내리지 않아 일 년에 두 번 수확을 할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를 짝 지워 주었는데, 그 지역은 따뜻해서 병이 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생계가 쉽게 충족되고 종자가 쉽게 번식하였다. 일본 사람들이 오늘날에 이르러 용감하게 살면서 삶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바로 이 전국시대의 기습(氣習)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서시의 사당이 지금까지 모셔져 있고,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과 왕래하였는데, “해가 뜨는 곳의 황제가 해가 지는 곳의 황제에게 편지를 보낸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이 이다지도 패려(悖戾)하고 오만하였다.

일본 동해의 섬 깊은 곳에는 별종의 물건이 있다. 그곳에는 황금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정철(正鐵 : 시우쇠라고도 하는데, 무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만든 쇠붙이의 하나이다.)은 나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아 무역을 할 길이 없다. 일본 사람이 그런 줄을 알고 큰 배에 정철을 가득 싣고 와 그 해안에 쌓아 놓고, 물러나서 다른 섬에 정박하였다. 며칠 뒤에 가보니, 정철은 모두 가져가고 황금을 정철의 숫자만큼 쌓아 놓았다. 왜인이 그것을 싣고 돌아왔다. 해마다 이렇게 하였다. 일본이 금과 보배를 훔치는 도적이 된 것은 이런 연유이다. 만주 쪽에서는 비록 아골타(阿骨打 : 금나라의 태조 황제)나 철목진(鐵木眞 : 테무진. 원나라의 태조)이 한 시기에 성공하여 이름을 떨쳐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오직 철기(鐵騎)를 타고 내달리는 것을 일삼을 뿐, 교외에 성을 쌓거나 부역을 시키지 않고, 노략질을 하거나 사냥을 하여 먹고 살았다. 이른 바 살육을 하는 것으로 먹고 산다는 것이 이것이다. 인륜도 없고 기강도 없으니, 말할 필요도 없다. ( 다음 호에서는 안남국(安南國)에 대해서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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