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낙인
전 창원교육장
전 경상남도교육위원
시와 수필, 서정문학 시인등단
저서:엉겅퀴,하늘꽃,한하늘 다른세상 외

정의연을 비롯한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들이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앵벌이를 시켜서 뭉칫돈을 빼 돌려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답시고 할머니들을 이용해 또 다시 울리고 있다.

정의연 위안부 쉼터에 머물던 길원옥 할머니 계좌에서 뭉칫돈이 수시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며느리 조씨가 쉼터 소장에게 돈 사용처 해명을 요구하자 쉼터 소장은 해명은 않고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조씨는 "진짜 위안부 할머니를 앵벌이 시켰구나 싶었다" "살이 떨렸다"고 했다.

시민단체가 이렇게까지 썩을 수 있나. 조씨가 쉼터 소장에게 재차 해명을 요구하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 며칠 뒤에 소장은 숨진 채 발견됐다. 그런데도 정의연은 소장이 검찰과 언론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한다.

정의연은 길 할머니가 2017년 받은 국민 성금 1억원 가운데 5000만원을 기부했다고 했다. 그러나 회계 장부에 기부 내역이 나와 있지 않다.. 상식으로 납득하기 힘든 의혹이 계속 쌓이고 있다. 검찰이 모두 밝혀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국민들은 위안부문제의 발생부터 한일 양국의 보상 문제, 국내의 정의연을 비롯한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의 모금운동까지 좀 더 사실적으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일본의 경우, 패전국으로서 피해국에 대한 배상금 지불이나 경제지원 등으로 많은 곤욕을 치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업자득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많은 상대국들과의 협상과정에서 한국을 제외하고는 모든 협상이 비교적 순조롭게 타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상 대상국이면서도 청구권을 포기한 국가도 있었고, 어떤 경우, 경제지원에 오히려 감사함을 표한 국가들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일본이 자국의 이익창출과 세력팽창을 위하여 이런 호기를 놓칠 일본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대부분 저개발국가인 그들 나라들에경제협력과 기술지원이란 미명하에, 그들 지역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배상청구권을 포기한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는 경제협력 지원금이란 명목으로 10~15억엔의 무상자금을 지원하였고, 심지어 미얀마에는 504억엔이란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기도 하였다. 이런 행위들이 모두 단순한 지원이겠는가? 아니다. 그 속엔 그들의 음흉한 계산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경제원조를 빙자하여, 동남아 지역의 시장개척과 경제권 확보를 통하여 거대한 경제 식민지 건설의 꿈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0-60년대 한국동란과 월남전에서 벌어들인 그 막대한 자금을 구미에 맞게 살포하여, 우호선린 관계를 형성하면서 철옹성 같은 시장을 구축하여 나갔던 것이다.

이 개척시장에 팔려나간 상품들은 이미 이른 개화기부터 축적된 기술로 제작된 제철, 조선, 전자, 자동차 등의 고부가 가치의 상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일본은 선심을 쓰면서도 도리어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배상금 처리에 전전긍긍하던 그들이었는데, 이제 세계 2~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지 않은가.

이렇게 일본은 악의 조건을 선의 조건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그런 안목과 용병술을 갖고 있는 나라임이 분명하다. 겉으론 피해국 지원이란 명분이지만, 속으론 투자보다 몇 십 배의 이익을 창출하는 그런 장면전환의 귀재요 실리추구의 전술가들이다. 이제 우린 적()에게도 교훈을 찾아내는 여유와 아량을 지닌 발전 지향적 도전자(挑戰者)가 되어보아야 하겠다.

 

중국의 경우, 비록 중국이 승전국으로 보상대상국이긴 하였지만, 대만의 장개석 정부와 중공의 모택동 정부로 2개의 중국이 공존하는 상태였다. 대만의 경우, 대결을 통한 본토 진출과 수복이 제1의 과제였고, 중공의 경우, 새로 편입한 티베트, 위구르, 내몽고 등의 관리 문제와 철의 장막 시대에서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한 시점에서, 양 정부 모두 일본과의 강화(講和)를 통한 경제적 지원이 꼭 필요한 처지였다.

그리하여 패전국 일본이 오히려 갑의 입장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장개석 정부와는 1952년에, 모택동 정부와는 1972년에 각기 배상금 청구권을 포기선언하고 말았다.

그 포기선언의 배경에는, 첫째 대내적으로는 국공(國共)간의 갈등이었고, 둘째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존엄 문제였다. 즉 양분된 중국으로서 일본을 거스를 수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역사적으로 수천 년 누려온 거대 중국의 위상제고와 존엄사수의 문제가 걸려있었던 것이다.

중국을 천자의 나라라 자부하며 수천 년 간 중화(中華)의 우월의식 속에서 살아온 중국으로서, 최근세의 청일전쟁(淸日戰爭) 패배와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 사건 등은 중국인으로선 자존심 상하는 치명적인 수치요, 모멸이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콧대 높던 이홍장(李鴻章)이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로 직접 달려가 피습을 당해가면서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대만(臺灣)을 할양하는 굴욕적인 강화조약(1895.4.17)을 체결한 일이라든지, 1937년 중일전쟁에서 30만 명 이상의 무고한 국민들이 왜군의 총칼에 무참하게 살해되었던 그 남경대학살 사건들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준엄한 현실, 살아남아야 하는 생물 아닌가. 화근을 자초할 콧대라면 아예 내려야했다. 일정액의 배상금을 받아내면 약간의 도움이야 되겠지만, 그건 사무 상의 처리로 끝날 뿐, 선린우호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면 감사의 대가를 기대할 수 있음이다. 그 대가는 분명 우호관계 형성과 경제 지원 체제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장-(-) 양 정권에서, 다같이 중국의 관대한 도량이란 대외명분을 앞세워 전쟁배상금청구권을 포기함으로서, 대외적으로 관대한 중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에겐 고마운 중국이란 새로운 이미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역시 중국의 판단이 옳았었다. 강한 배상금 요구와 보복 행위를 염려하던 일본으로서는 중국의 청구권 포기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 곧 일본의 감동은 강력한 경제 지원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 일본의 감동은 주은래 수상의 보상금 포기에 대한 그 사유 발언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중국이 일본에 전쟁배상을 요구하면, 일본 인민에게 부담을 지우게 된다. 전쟁책임은 일부 군국주의 세력에게 있어 이들과 일반국민들을 구별해야 한다.

때문에 일반국민들에게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되며, 더욱이 차세대에게 청구권의 고통을 부과하고 싶지 않다.” 라는 의미심장한 그 발언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혜안을 지닌 지략가로 실리와 감동을 함께 빚어내는 노련한 지도자였다. 1972년 그 협상 이후 일본은 중국의 최대 경제원조국이 되어 중국의 개혁개방에 촉진제가 되었다. 그간 정부개발원조금 34천억 엔(320$)이 투입되었는데, 이 금액은 일본의 대외원조금의 66.9%에 해당한다. 이 기금은 주로 공항, 철도, 지하철 등 주요 기간 산업시설에 투자되어 거국적 경제개발을 촉진하였다.

사실상 배상 증여금에 해당하는 무상원조자금도 누적액 1,500억 엔에 이르며, 빈민 원조프로젝트 사업에 매 프로젝트 당 1,000만 엔씩 제공되어 주민들의 복지향상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한편 기술지원 사업으로서는 일본 전문기술자의 현지파견 및 기자재 공급(5,376)과 중국기술연수생 일본연수(16,839) 등 기술협력 프로젝트에 2004년까지 1,600억 엔이 투입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중일은 앙숙 관계였지만, 피해자의 앞선 포기선언은 가해자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그 감동은 사죄와 보상의 뜻을 담아, 대륙의 경제개발로 이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인의 담대한 도량과 일본인의 반성적 태도를 볼 수 있음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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