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빚어낸 맛, 막걸리 문학 (Ⅰ)

막 거른 술이라 하여 막걸리, 빛깔이 희다고 하여 백주, 집마다 담그는 술이라 하여 가주, 그 이름도 다양한 막걸리. 특히 농가에서 필수적인 술이라 하여 농주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막걸리나 단술을 가리키는 말이 나오고, 고려시대 문헌에도 탁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은 깊을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한반도의 발효주

술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발효주(醱酵酒)이고 다른 하나는 증류주(蒸溜酒)이다.

발효주는 곡물이나 과일 등이 효모와 뒤섞여 발효 작용을 일으켜 생긴 술이다.

자연 상태에서도 얻을 수 있고, 한편으로는 인위적으로 곡물, 과일로 발효 작용을 일으켜 얻기도 한다.

증류주는 발효된 술을 증류 시켜 얻는다. 증류는 자연 상태에서 생기지 않는다. 반드시 인위적인 증류 장치를 이용하여 얻을 수 있다. 발효주는 대체로 알코올 도수 18~19도 이하다.

더 높은 알코올 도수를 원하면 증류의 방식을 통해야 한다. 위스키나 중국 고량주, 보드카, 우리 전통 소주가 모두 증류주다.

막걸리는 대표적인 발효주다. 도수는 대략 18도 이하이다.

우리나라 막걸리의 경우, 물 등으로 희석하여 6도 전후의 술로 내놓는다.

막걸리의 역사는 깊다. 곡물, 과일 등을 발효시켜 얻는 막걸리에 관한 기록은 오래됐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세종 15(1433) 10월의 기록이다.

제목은 술에 대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내용의 글을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이다.

후위(後魏)의 하후사(夏候史)는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상중(喪中)에 있으면서도 슬퍼하지 아니하며 좋은 막걸리[]를 입에서 떼지 않으니, 아우와 누이는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는데, 마침내 술에 취한 채 혼수상태[]로 죽었다.

세종 15년이면 조선 건국 초기다. 건국 초기는 재정의 중요성이 더 크다.

나라의 기본은 곡식이다. 먹고살아야 한다. 술은 반대이다. 귀중한 곡물로 빚으니 곡물 허비가 심하다. “술을 마시지 말라라는 훈계의 내용을 담은 것이다.

중국 후위의 하후사는 상 중임에도 술을 즐기다가 결국 술로 죽었다는 내용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 모두 막걸리는 ()’로 불렀다.

좋은 술, 좋은 막걸리는 순료(醇醪)’로 불렀다. 우리 막걸리의 특질은 다양함불확실성이다. 좋은 막걸리, 술을 순료로 부르면서, 한편으로는 험한 술, 술기운이 약한 것도 멀리하지 않았다. 이 술이 더 좋다, 나쁘다고 가르지 않고 다르다고 여겼다.

조선 중기의 문필가 석봉 한호(1543~1605)는 흔히 한석봉으로 부르는 명필이다. 그는 순료가 아닌 엷은 술, 박주(薄酒)를 이야기한다.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 불 혀지 마라. 어제 진달 돋아 온다./ 아희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지리산막걸리학교 교수 류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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