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기행-24

고조선을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옛날의 조선이란 뜻에서 옛 고자를 붙인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고조선(古朝鮮)’이라는 이름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기이편에 처음 나온다. 삼국유사는 이성계가 조선 건국하기 약 100년 전, 고려 충렬왕 때였다. 아직 건국되지도 않은 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자를 붙였을 리는 만무하다.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이리는 제목 아래 단군(檀君)조선기자(箕子)조선에 대하여 서술한 다음, 뒤이어 위만(衛滿)조선이라는 별도의 제목을 잡아 위만조선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즉 조선을 위만조선과 그전의 조선. 이렇게 둘로 나누고, 위만조선과 그전의 조선을 구분하기 위해 자를 붙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조선과 나란히 왕검조선이라고 써줌으로써 고조선을 왕검조선이라고도 한다는 것을 밝혀놓았다. 삼국유사의 해당 대목을 보면

 

고조선/왕검조선

…그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일렀다.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

주나라 무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위만조선

연나라 사람 위만은 망명하여 그 무리 1천여 명을 노아서 동쪽으로 달려 요동 변방의 요새을 나와서 패수(압록강)를 건네 진나라의 옛 빈터 위아래 요새에서 살았다.

 

조선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뿐만 아니라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실려 있다. 이들 책에는 단군조선을 전조선, 기자조선을 후조선, 그리고 위만조선으로 삼조선으로 나누었으며, 그 시대에 널리 통용되었다.

그러다가 17세기 호란 후에 기자조선을 정통의 시발로 삼고 우리 역사를 기자조선-마한-신라-고려-조선으로 체계화 하여 자리를 잡았다.

 

기자(箕子)는 중근 은나라 충신으로 일찍이 공자는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더불어 은나라의 어진 삼인이라고 칭송해 마지 많았다.

기자를 공자와 맹자와 버금가는 성현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기자의 생애와 업적, 기자조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 기자실기를 쓴 율곡 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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