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삼단(三壇)복원추진위원회 활동을 통하여 문화재 지정 추진
발굴 4년 만에 진주사직단을 경상남도문화재기념물 제291호 지정되는 성과 이뤄
진주여제단은 州의 北쪽 1里 義谷寺 위쪽 진양지(1622년)에 기록

 

인간은 오래전부터 토지 위에서 생활과 생산을 영위해왔다. 토지는 모든 생존의 기본이다. 집과 음식은 토지 위에서 창출된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의 도시계획에는 항상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성소(聖所)가 포함되었다.

토지신은 ()’, 곡식신은 직()‘이라고 하여 사직단(社稷壇)을 설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사직단을 설치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발견된다. 고려 성종 10(991)에 사직을 세웠고 조선은 태조4(1395) 인달방에 역시 사직을 설치했다.

 

한양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각각 설치하였다. 이를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한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들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이다. 사직단에는 기곡제(祈穀祭), 기우제(祈雨祭), 기청제(祈晴祭), 기고제(祈告祭) 등이 열렸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의 존망을 결정하는 정신적 지주이기 때문에 종묘사직은 종종 국가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도시의 인문적 특성을 오랫동안 천착해 온 한국국제대 신상화 교수는 도시계획의 이상향을 기술한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좌조우사(左祖右社) 배치의 기술이 있고 대도(북경)의 공간배치에서 북경성 내의 자금성 앞 좌우로 좌측에 태묘(太廟), 우측에 사직단을 배치하여 이를 실천하고 있다고 했다.

이 모두가 백성을 섬기는 군주의 마음이 서려 있는 곳으로 궁궐에서는 군주가, 지방에서는 고을 수령이 대신 행했다.

 

진주는 관아(官衙)시설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에는 진산 비봉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향교, 서쪽()에 사직단, 남쪽에 성황단, 북쪽에 여제단(祭壇)을 설치했다.

, 조선초 전국 군현에 설치한 13(廟壇)의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진주 사직단은 18세기초 진주 고지도, 19세기 진주성도(LH 박물관 2층 계단에 설치, 원본은 규장각)에도 분명히 표시되어 있다.

진주 사림 성여신이 1632년 완성한 진양지(晉陽誌)는 진주목의 풍속, 지리, 성곽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의 서쪽 5리 대롱사((大籠寺) 위에 사직단이 있다. 제례는 2월과 8월에 봉행하고 가뭄이 심하거나 풍년을 기원할 때 기우제와 기곡제를 지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진주 사직단이 일제 강점기 들어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2010년부터 사직단 복원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진주삼단복원추진위원회 최진수 위원장 등 진주지역 향토사학자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사직단이 지난 20188월 경상남도문화재기념물 제291호로 지정되는 성과를 내었다.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이 신인 직()에게, 성황단(城隍壇)은 지역 수호신에게, 여제단(厲祭壇)은 흉년에 굶어 죽거나 후손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한 무주고혼(無主孤魂) 원귀을 위령하고 무서운 역병으로부터 재난을 막고자 제사로써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이다.

진주여제단추정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
진주여제단추정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

 

경남지역의 사직단의 경우는 산청군 단성 사직단이 유일하게 남아 있었고, 창녕·진주·고성 사직단이 복원·발굴돼 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

하지만 경남자역 여제단은 현재까지 형체가 드러난 곳조차 없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경남지역에도 각 고을마다 여제단이 있었으나, 1908년 일제에 의해 폐지되면서 그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11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제단의 존재를 기억하는 어르신들이 있었고, 그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남발전연구원 측은 경남의 여제단은 옛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과거 석축 1~2단 정도의 제단을 지었지만, 지금은 허물어지고 풀, 흙이 덮여있어서 설사 그 지점을 찾아가더라도 육안상으로 찾아내기 쉽지 않다제단 옆에 초막이나 기와집을 지었을 수는 있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지표조사를 정밀히 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진주삼단 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최진수)의 여제단과 성황단은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발굴에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 자료와 증언들을 수집한 가운데 사직단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고, 여제단은 진주시 상봉동 450번지 일원에 발굴돤 석축으로 확인이 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1530년 발행)에 진주의 여제단은 在州北. 진양지(1622)에는 1里 義谷寺 위쪽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주여제단복원추진위원회 최진수 위원장
진주여제단복원추진위원회 최진수 위원장

 

지금은 비봉산의 여제단 발굴현장 조사와 의견수렴, 공청회 등으로 추진의지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진주여제단의 복원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것이라며 진주의 중요 문화유산 복원에 시민들의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여제단추진위원회측은 진주시에 그 일대의 지표조사를 요청하는 등 심혈을 쏟고 있다.

 

복원추진위원회 최진수 위원장은 500년 전 자료인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진주여제단의 위치를 토대로 현장에서 기와조각, 우물과 집의 흔적과 500년 된 석축이 발견되었고 “40여년 전 어르신들이 그 장소에 여제단이 있었다고 말을 했다며 주민의 증언 등을 자료로 문화유산 진주여제단의 빠른 시일 내 복원이 될 수 잇도록 지속적인 추진활동을 이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에 진주시는 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진주 사직단의 경우 위치나 흔적이 완벽히 드러나기 때문에 복원 문화재 지정이 되었지만 진주여제단 위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만 의존하고 있다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하고, 지금 예산을 들여 지표조사를 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향토·역사학자 등 전문가들의 협조가 있거나 그 위치가 여제단이 맞다는 공감대가 형성 됐을 때 지표조사 등을 할 계획이다고 밝히고 있다.

[자료정리 대담 : 편집국장 류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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