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에 포목과 한복을 배워, 진주전통유등시장 한복점 「비단향」
큰언니 한복포목점에서 한복을 배우며, 진주기술고등학교 양재과 17세에 입학
지금은 맞춤 옷 보다는 대여 추세인 현실, 한복 전문재단사 후계자 양성이 목표

한복 짓기는 자기다움을 찾는 것다시 태어나도 한복 지을 것

진주중앙유등시장에 자리한 한복의 명인집 비단향’ 

50년을 한복 제작에 인생을 바친 한복명인의 소문을 듣고 본지 편집국에서 천연염색 연구가 이학박사 하영갑 논설위원과 함께 명인의 집 비단향을 찾았다.

한복 명인답게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웃음으로 맞이해준 김옥순 여사의 인사 첫마디가 기자님은 우리나라 한복의 날이 언제 인지 아십니까?”이다.

50년 한복으로의 외길 인생 김옥순 한복명인 (사진 하영갑)
50년 한복으로의 외길 인생 김옥순 한복명인 (사진 하영갑)

 

문을 열고 들어서니 친근한 연분홍 저고리와 다홍치마가 먼저 반긴다.

가게 안을 빙 둘러보니 색색의 아름다운 한복들과 진주실크 비단들이 두 눈을 사로잡는다.

혼기를 앞둔 내 딸에게 입혀 공주로 만들어 주고 싶은 한복, 손주 손녀들에게 입히면 좋을 앙증맞은 색동저고리부터 한눈에도 따듯해 보이는 솜 넣은 누비저고리, 금은박 물린 화려한 당의와 기품 있어 보이는 궁중 한복도 꽤 많다.

 

"제가 바느질에는 재능이 있었나 봅니다. 한복 짓기를 시작하고 결혼 후 남편과 아이들에겐 늘 한복만 입혔습니다. 일가 친인척은 물론 친구와 친구의 친구들까지 한복을 부탁해와 초창기 가게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진주기술고등학교 양재과를 졸업하고 시작한 한복의 외길, 다시 태어나도 한복을 짓겠다는 김옥순 여사는 올해로 50년째 한복을 짓고 있는 한복의 명인이다.

 

: 인사하실 때 우리나라에 한복의 날이 있다고 하셨는데, 한복의 날이 어떤 날입니까?

명인: 보통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날입니다. 바로 한복의 날입니다. 한복의 날은 한복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한복의 우수성과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한복을 입기 가장 좋은 시기인 10월 중에 정하며, 1997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코로나19 감염사태가 오기 전까지는 문체부와 한복진흥센터가 주최, 주관을 맡아 행사를 개최해 왔는데, 이날은 공원과 박물관 등 유적지에 한복 착용자는 무료로 입장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복의 날에 대하여 김옥순 명인은 드라마나 케이팝(K-pop)에서 비롯된 한류열풍이 우리 복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며 한복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때, 국민들이 한복을 자주 입을 수 있는 문화확산이 절실해요.”

일본에서는 혼례나 축제, 국경일, 입학·졸업식 등에 전통의상 기모노를 입고 즐기는 문화가 잘 형성돼 있습니다. 베트남 아오자이는 지속적인 개선정책으로 베트남의 민족의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차이니스 드레스라 불리는 중국 치파오역시 지속적인 개량으로 실용성까지 보완해 대중적 복장으로 자리매김했는데, 우리 한복문화는 사양길인 듯한 것이 정말 슬픕니다.” 라며 한복입기를 강조했다.

 

: 한복 짓기를 처음으로 시작하게 된 동기와 몇 년째 해 오셨는지요?

명인: 중학교를 갖 졸업했을 당시 한복집을 경영하든 큰언니가 한복을 배울 것을 권유했다. 그 후 진주기술고등학교 양재과를 입학하여 정식으로 복식을 공부하기 시작하게 됐으며, 큰언니가 경영하던 한복점에서 한복재단과 바느질을 배울 때 당시 큰언니는 제게 그냥 바느질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 다음에 한복의 달인이 돼야 하지 않겠냐? 라며 그럴려면 양재를 비롯하여 복식의 모든 분야에 대해 알아야 된다고 하셨어요. 늘 변하는 게 패션인데 왜 한복을 지켜야 되는 지를 세월이 가면서 알 수 있었어요. 역시 큰언니의 말이 맞았어요.” 그 후 1970년대 초 한복집을 차려 독립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 50년동안 한복을 지어 오셨는데, 명인에게 한복 짓기는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명인: 한복집 경영에 대하여 흔히들 밥 줄이라고 들 말합니다마는, 저희 집 생계문제는 공무원이셨던 남편이 있었기에 별 걱정은 안 했습니다. 궂이 표현을 한다면 나의 생명 줄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즉 한복은 나의 모든 것이었으니까요.

한복은 한 땀 한 땀 ’()을 불어넣어 한복의 고운 맵시와 단아한 멋스러움으로 입는 사람이 최고로 아름다움으로 탄생되도록 열정을 쏟아서 만들뿐만 아니라 내 자식과 같은 마음으로 작품으로 내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남강과 같은 자연의 서정적 감성을 씨줄, 전통적 미()와 현대적 감각을 날줄로 삼아 한복을 짓고 있다. “(한복 짓는 일이) 힘들었다면 제가 못 했을 텐데, 힘든 다음에는 언제나 대가로 희열(喜悅)이 크게 와 닿아요. 어찌됐건 다시 태어나도 한복을 할 거예요.”

한복을 짓기 위해 지단을 하고 있다(사진 하영갑)
한복을 짓기 위해 지단을 하고 있다(사진 하영갑)

: 근래 한복 이용문화가 많이 침체되어 수입이 많이 떨어졌을텐데, 요즘 한복을 짓는 심정은 어떠하신지?

명인: 우리 진주는 한복의 원단이라 할 수 있는 실크, 즉 비단의 원산지이기 때문에 한복 짓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도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시대적 유행에 따르지 않는 원단, 디자인으로 복()을 짓는 명인 한복으로써 진주 중앙시장 한 장소에서 중간 유통과정 없이 직접 디자인·제작을 하고 있으며,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시대적 유행에 따르지 않는 원단, 디자인으로 한복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 물론 우리 고장 진주는 실크의 명산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만은, 명인께서 진주실크에 대하여 아시는 만큼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명인: . 학술적까지는 몰라도 진주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아는 범위 내에서 알고 있는데 까지 말씀을 드린다면, 천년을 이어 온 우리 고장 진주 비단입니다.

실크의 세계 5대 명산지는 이탈리아 꼬모, 중국 항저우, 일본 교토, 프랑스 리용. 그리고 우리나라 진주로 알고 있습니다.

진주가 세계 5대 실크 명산지가 되기까지는 화려한 비단을 완성하는 염색기술이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남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주에서 생산되었던 진주비단은 남강의 풍부한 수량과 일조량 등 천혜의 자연조건이 맞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들은 바로는 예전에 왕의 어의에 사용되는 능라사(綾羅絲)를 진주에서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진주의 비단이 뛰어 났기 때문인데, 그러한 비단으로 한복을 지으니, 곱디고운 한복이 안 될 수가 없겠지요.

 

또 제가 어릴적 한복을 배울 당시에 들었던 진주뉴똥이 있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한복지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본래 한복은 궁중 왕실과 기녀들이 입었습니다. 궁중의 복식은 양반, 선비들로부터 지금의 복식으로 전래 되었고, 그 당시 기녀(妓女)들이 지금의 탈렌트 역활을 했듯이 기녀들이 입었던 복식은 지금의 탤런트의 복식이 되어 패션의 리더로 현대 복식문화를 이끌고 있습니다.

김옥순 명인이 경영하고 있는 진주중앙유등시장 내 한복점 「비단향」 (사진 하영갑)
김옥순 명인이 경영하고 있는 진주중앙유등시장 내 한복점 「비단향」 (사진 하영갑)

: 한복 짓기를 50년을 하셨다면 한 평생 을 다 바쳤다고 할 수 있겠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한복 짓기를 50. 공무원으로 퇴직한 공무원과의 사이에 남매를 뒀는데, 우리집 자녀들은 다른 분애를 전공하여 진출하게 되었고, 결국 나의 한복 노하우를 전수받을 후계자가 없어 걱정입니다.

더군다나 작년 초부터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로 결혼행사가 없음에 따라 한복점은 도산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한복은 행사 때 한복점에 와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본 후 사는 제품이기 때문에 비대면 시대가 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한복 한 벌 지으려면 바느질하는 데 꼬박 사나흘은 걸리다 보니 살림은 뒷전이고 옷만 지어 왔는데, 뒤돌아보니 이제사 남편과 장성한 남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그동안 축적된 진주비단으로의 한복 짓기 노하우를 전수 받을 후계자를 빨리 찾게 디기를 바랄뿐입니다.

 

한복을 만들어 입는 것은 사실 쉽지 않지요. 옷감 가격도 만만찮고 공임도 많이 들어 부담이 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렴한 옷감으로라도 한복을 지어 한복의 날과, 명절 때만이라도 온 가족이 갖춰 입는 한복문화를 확산시켜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것이 저의 50년 한복인생의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합니다.“

[대담: 편집국장 류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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