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갑 수필단상

미치니 미치더라. 내가 처음 본 미친 사람은 얼굴을 본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내가 기억을 살릴 수 없는 나이에 떠난 사람(엄마)이기에. 두 번 째 미친 사람을 본 것이 아버지의 장남이었다. 이는 아버지도 동네 사람들도 저 집 큰 아들은 미쳤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세 번 째 미친 사람을 본 것은 우리 집에서 아버지에게 치유의 말을 듣기 위해 온 정신병자였다. 그 외에는 풍문과 언론을 통한사건 사고의 뉴스 속 주인공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내가 미쳐버린 것이다. 우선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열아홉 살이나 나는 처녀로 시집오신 어머니에게 빠졌고, 하나 씩 둘 씩 태어나는 귀여운 동생들에게 빠졌으며, 그러다가 여섯 명이나 되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한 아버지의 무겁고 무거운 노고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어 삶의 기본적 욕구인 입치레 보상으로 아버지 일에 몰두하다 미쳤었다.

 

6~70년대에는 정부에서 벌거숭이산들을 되살리기 위한 치산녹화사업으로 성공적인 사방사업을 위해 묘목생산과 초지조성을 위한 종자생산을 독려했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와 아버지는 이 사업에 전력을 다 하였으며, 이로 인한 노동의 대가로 수입이 짭짤한 농촌 여성들까지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조림용 묘목생산과 사방용 종자채취 사업의 대가로 동생 여섯을 학업과 결혼을 모두 순조롭게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나라는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해 공장건설은 물론 식량증산을 위한 통일벼 재배. 고속도로와 지하철이 개통되기 시작해 온 국민들의 가슴을 들뜨게 했으며, 치욕적인 군부반란사건들이 온 나라를 뒤흔든 혼란의 시기도 있었다.

 

80년대에는 ‘5·18광주 민주화운동’, ‘6월 시민항쟁‘6.29선언. 이 모두가 가난을 벗어나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망과 민주주의 자유수호에 몰입한 나머지 벌어졌던 순수한 국민 목표에 미치려 한 일들이 아니었던가. 이런 엄청난 일들이 일어난 가운데 우리 부부사이에는 새로운 희망인 두 아들이 태어났다. 그 때 내가 완전 미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제야 제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손아래 형제의 뒷바라지는 이정도면 족했고 천정에서 비가 새어 방바닥에 다라를 놓고 지내는 신세를 면해야겠다는 맘이 생겼으며, 지금부터는 내 가정 내 자식들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늦깎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대에 부풀었던 몇 가지 사업의 실패. IMF 외환위기 속의 가정경제 발전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또 다른 피신처인 만학(晩學)’이라는 동굴 속에서 칩거(蟄居)를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고 하고 싶은 일, 쓰고 싶은 글을 쓰며 지낼 수 있어 얼마나 마음의 여유로움을 갖고 사는지 모른다. 바닥에 떨어진 이 나라경제와 코로나19 환경. 이를 극복하기위해서라도 늦은 감은 있지만 정부나 국민 모두가 미쳐보자 미치도록. 그러면 못 미칠 것 있겠는가. 힘들지만 더 참고 견뎌 옳게 미쳐보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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