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례문과 흥인지문 현판의 비밀 -

조선의 건국자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한 후, 궁궐을 중심으로 종묘와 사직 그리고 둘레 18Km의 성곽공사를 추진했다. 성곽공사와 더불어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만들고 명칭도 부여했다. 그런데 한양의 4대문은 단순히 사람이 드나드는 성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덕목 오상(五常)을 대문 이름에 하나씩 담았다.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대문은 지혜 지(智)글자의 뜻이 담긴 고요할 정(靖)을 사용하여 숙정문(肅靖門), 그리고 도성 한가운데 종루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 명명했다. 이는 백성들이 사대문을 쳐다보고 드나들면서 인(仁).의(義).예(禮).지(智)의 4덕을 갖춤과 동시에, 나라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보신각종을 타종하면서 신(信)을 돈독하게 하려는 것이 조선이 지향하는 이상 국가였다.

그런데 남쪽에 있는 숭례문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현판 글씨가 가로쓰기가 아닌 세로로 배열되어 있으며, 대문의 위치도 정남쪽이 아닌 서쪽으로 치우쳐 있고, 대문의 방향 또한 정면이 아닌 서울역, 효창공원을 향하고 있다. 동쪽에 있는 흥인지문 또한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현판 글씨에 갈지(之)가 첨가되어 4글자로 구성되어 있고, 다른 문에서 보이지 않는 옹성이 갖추어져 있다. 이렇듯 한양도성의 4대문 가운데 특히 남대문과 동대문의 현판 글씨에는 음양오행사상에 입각한 내용뿐 아니라 풍수적인 비보책도 함께 숨겨져 있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궁궐을 남향으로 건립했을 때 풍수적으로 가장 큰 위협이 된 것은 관악산 불기운이었다. 관악산은 오행(五行)으로 보았을 때 불기운이 치솟는다는 화(火)의 기운을 지닌 산이다. 이 기운이 궁궐에 직접 영향을 미쳐 화재가 빈번히 발생할 것이며 크고 작은 우환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무학대사의 주장이었다. 이와 관련된 문헌 자료를 찾기는 어렵지만 관심을 가지고 현장을 조금만 둘러보면 그 대비책으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알 수가 있다. 첫째, 궁궐과 관악산 사이에는 한강이 가로질러 흐르지만 거리가 멀어 실제적인 화재 예방에 효과적일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인공 연못을 조성해서 관악산에서 뿜어 나오는 화기를 예방하고자 했다. 둘째, 성곽의 정문인 숭례문을 북한산(백운대)-경복궁-숭례문-관악산 축선에 맞게 배치하되 숭례문의 대문 방향을 정남쪽에서 서쪽으로 조금 틀어 관악산의 화기가 직접 닿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셋째, 남대문의 현판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쓰고 세로로 배치했다. 여기에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불기운으로 제압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즉, 숭례문의 숭(崇)이라는 글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모습을 본 뜬 상형문자이고, 례(禮)란 글자는 오행으로 분석하면 화(火)에 속하면서 방위로는 남쪽에 해당한다. 이렇듯, 숭례는 ‘남쪽에 불을 지른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 글자를 세로로 쓴 것은 불을 불로써 막아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니 결국 ‘이화제화(以火制火)’로 관악산 화기를 막겠다는 맞불 작전의 의도가 현판 글씨에 숨겨져 있는 셈이다. 넷째, 관악산 불기운이 직접 궁궐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도로의 축을 틀어 놓았다. 그 결과 경복궁의 축선과 세종로 (조선시대 육조거리) 축선이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경복궁의 안산(案山)격인 황토마루(현재 조선일보 근처)에서 종로거리로 축선을 틀어 남대문 시장을 지나 숭례문으로 도달하도록 도로 계획을 수립했다. 다섯째, 조선의 제26대 고종 임금 당시 흥선대원군은 불탄 경복궁을 270년 만에 중건하면서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돌로 해태상을 조성하여 광화문 입구에 배치했다.

한편, 한양 성곽의 동쪽에는 동대문이 있다. 동대문의 원래 명칭은 흥인문(興仁門)이다. 한양도성계획의 일환으로 태조7년 (1398)에 완성했으나, 파괴되고 지금의 것은 고종6년 (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때 편액의 글씨에 갈지(之)라는 글자를 첨가해서 오늘날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불리운다. 풍수에서 갈지(之)라는 흔히 산(山)이라는 글자 대용으로 자주 사용된다. 그래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명명한 것도 동쪽의 허함을 풍수적으로 보충해주기 위해서 사용한 풍수처방인 것이다. 또한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서 적을 방어하고 지키기에 편리한 기능이 있다. 따라서 이곳에 옹성을 쌓은 이유도 갈지(之)라는 글자를 첨가한 것과 더불어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은 허함을 풍수적으로 보충해주기 위한 이중 장치라고 생각된다.

문화재 사랑은 관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관심이 있어야 호기심이 생긴다. 호기심이 생기면 비로소 의문이 든다. 그러면 비로소 어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오늘은 모습을 나타낸다. 남대문과 동대문이 의미가 있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고건축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옛 사람의 자연관과 풍수관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는 안목이 생길 때 과거는 오늘 우리 앞에 되살아 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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