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데뷔 1000여곡 불러 진주를 예술의 도시 명성 남겨

 

‘가요황제 남인수는 진주시 하촌리 소재 문중선산 에 잠들어 있는 본명이 강문수이다

1918년 부 강영태 모 장하방 사이에 태어난 남인수는 경남 진주에서 출생. ‘가요황제’로 불리다 1962년 4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사망 후 진주시 장재동 산 49번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남인수 장남 강대우, 차남 강대익이 미국에 거주하는 관계로 묘를 관리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가요황제 남인수전승보전회’에서 2004년부터 묘 단장을 하는 등 관리를 하다가 보전회에서 남인수 타계 50주년을 맞아 2012년 묘소를 진주시 초장동 하촌리 진주姜씨 문중 선산으로 옮겼다.

남인수 비석에는 ‘예술인 진주강공휘문수(藝術人 晉州姜公諱文秀)' 가요황제 남인수의 묘(歌謠皇帝南仁樹之墓)'라고 돼 있다. 남인수가 강문수임을 밝혀둔 것이다. 이 묘역을 만든 보존회 회원들은 이장 당시 제를 올린 뒤 '애수의 소야곡' '청춘고백' 등 고인의 대표곡을 함께 부르,며 고인을 추억했다.

현재는 ‘남인수기념사업회, 전승보존회’ 외에도 강씨 문중사람들과 남인수를 추모하는 사람들은 ‘가요황제’의 업적과 전통 계승 발전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진주 견불사는 십수년 째 남인수의 제를 지내는 곳으로 아버지 강영태가 머물던 장소다. 이곳에서 남인수가 아버지 강영태와 함께 지내며 절 옆 바위에서 목을 틔웠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가수 남인수를 제대로 알리고자 결성하여 20여 년동안 활동을 이어오다가 지난 7월 경상남도로부터 비영리법인으로 허가를 받아 법적등록을 마치고 진주시 문산읍애 사무실을 개소한 사단법인 남인수기념사업회 손춘매 이사장은 ”남인수는 진주강씨 문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강씨문중과 함께 남인수 제를 모시며 활동을 이어왔다. 금번 법인으로 인가를 받아 본격적으로 가요황제 남인수 선생을 제대로 알리고 옛 명성을 복원하는데 혼신을 다하겠다”는 법인 이사장 취임 일성이다.

 

남인수 의 가요활동

한편 강문수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가요황제’라는 말을 들어왔다. 1935년 말에서 1936년 초 시에론 레코드사 가수로 선발 된 이후 평생 1000여곡을 넘게 불러 진주뿐만 아니라 전국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남인수는 1936년 2월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했다. 이후 1937년 오케(Okeh)레코드사로 이적, 1938년 이부풍(李扶風) 작사, 박시춘(朴是春) 작곡의 ‘애수의 소야곡’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1943년까지 전속가수로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등 130여 곡을 발표했다.

해방 이후 음반 제작이 많아, 여러 악극단에서 무대공연 중심으로 활동했다. 음반 제작이 재개된 1947년 이후엔 ‘가거라 삼팔선’ 등을 불렀고, 1948년에는 아세아(Asia)레코드사를 통해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6·25 전쟁 중에는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소속으로 군 위문활동을 했다. 이후 오리엔트(Orient)레코드사를 비롯한 다수의 음반회사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 ‘추억의 소야곡’ 등 다수의 곡을 발표했다. 1957년 대한레코드 가수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60년 전국공연단체연합회 회장, 1961년 한국무대예술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36년 당시 9세의 소년 시인이었던 김상화 작가의 시에 곡을 붙인〈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38년 데뷔곡을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 년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물방아 사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항구의 청춘시(靑春詩)〉,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낙화유수〉,〈남아일생〉,〈일가 친척〉;〈가거라 삼팔선〉,〈달도 하나 해도 하나〉, 〈청춘 무성〉, 〈고향의 그림자〉, 〈고향은 내 사랑〉, 〈이별의 부산정거장〉, 〈청춘 고백〉, 〈추억의 소야곡〉, 〈산유화〉, 〈울리는 경부선〉,〈무너진 사랑탑〉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약 1천곡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시에론레코드에서 취입한 데뷔곡으로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다시 부른 노래였다. 남인수는 시에라레코드의 박영호, 박시춘을 통해 가수로 데뷔했다가 오케레코드에서 스타가 되었다. 이 당시 남인수의 등장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성의 가수 탄생'으로 크게 선전되었다.

가요황제 남인수의 묘
가요황제 남인수의 묘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백년설, 박향림과 함께 부른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그대와 나〉, 〈아들의 혈서〉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강제동원 가요를 군국 일제에 의해 취입하였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남인수를 백년설과 함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지만 대중 가수가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기각했다.

사망 전 한국연예인협회 부이사장, 대한가수협회 회장 등을 지냈고,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진주의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5] 되어 있고[6], 동상과 노래비도 세워져 있다.[7] 진주시가 주최하는 예술제에 포함된 남인수가요제 개최를 시민단체가 남인수의 친일 경력을 들어 반대하는 등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다.

주요 노래로는 "낙화유수", "가거라 삼팔선", "추억의 소야곡",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과 함께 1949년 9월 1일에 대한민국 최초로 금지곡이 된 여순사건을 다룬 "여수야화"가 있다.

[편집국]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