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참전(參戰)(6)

강신웅 교수님
강신웅 교수님

<본 고는 대구자수박물관 정재환관장이 30여 년 전에 백병풍(白屛風)에서 발굴, 소장해온 국내의 희귀 고문헌자료로서, 조선조 인조2년(1624) 일본에 수신사(修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계영(辛啓榮 1577∼1669)이 그 어떤 정사(正史)에서도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당대의 신빙성 있는 고사(故事)를 한자(漢子)원문으로 기록한 역사자료이다.>

(지난 호에 이어서)

찬획주사(贊畫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소를 올려 양호가 싸우지도 않고 군사를 잃은 죄가 있다고 탄핵하고는, 군적을 회수하여 가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현(沙峴)의 길가에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그리고 만세덕(萬世德)이 양호를 대신하여 경리가 되었다.

왜적은 세 갈래로 나뉘어, 동쪽 노선의 가등청정은 울산의 도산(島山)에 근거지를 두었고, 서쪽 노선의 소서행장은 순천의 예교(曳橋)에 근거지를 두었고, 가운데 노선의 석만자(石曼子)는 사천(泗川)에 주둔하였다. 명나라 군사도 셋으로 나뉘어, 마귀(麻貴)는 가등청정을 상대하였고, 유정(劉綎)은 소서행장을 상대하였고, 동일원(董一元)은 석만자를 상대하였다. 수군(水軍)은 대장 진린(晉璘)이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수군을 거느리고 수로의 동서에서 구원하고 대응하였다. 무술년(1598년) 9월에 세 노선에 있던 병사들이 일시에 적의 주둔지로 쳐들어가서, 혹은 불사르고, 혹은 목을 베어 죽이고, 혹은 퇴각하도록 하여 우리 군사를 보호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적병들은 많이 죽었다. 후에 동일원 장군이 또 적과 싸웠는데, 거의 다 이기다가 약 궤짝에 불이 나는 바람에 패퇴하였다. 11월이 되어 가등청정이 군대를 숨겨 밤에 달아났는데, 유정이 왜가 거짓으로 항복한 것을 인하여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였을 때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석만자가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도왔는데, 진린과 이순신이 두 경로를 차단하여 죽이고 그 배를 불사르니, 연기와 화염이 바다에 가득차고, 바닷물이 붉게 변하였다. 석만자가 거기에서 죽고, 이순신도 탄환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도 죽었다. 이 날 삼국의 명장이 모두 죽었는데, 소서행장은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오직 가등청정만 피해 있어서 죽임을 당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러나 전후로 잃어버린 것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대개 풍신수길이 7월 즈음에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여러 적장들이 낭패를 보고 돌아가서 손실이 많았고, 대군은 개선하여 돌아와서 훈련원(訓鍊院)에서 태평연(太平宴)을 베풀고, 군대를 철수하여 서쪽으로 돌아갔다.

이 때 전쟁이 일어난 7년 동안에 온 나라가 혼이 나고 무너진 나머지, 동서에서 세운 책응(策應 : 우군 사이에 계책을 통하여 서로 돕는 일)과 자신을 위한 비용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성상(聖上)이 명철하고 슬기로워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것이 모두 환심을 샀다. 충성스런 신하들이 분주히 다니면서 대군의 뒷바라지를 하여 물자가 부족한 적이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경사를 이루었으며, 비로소 다시 태어나는 즐거움이 있게 되었다. 혹시라도 성스러운 천자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벌하여 죽이려 하거나, 시종일관 건져서 구제하려 하지 않았다면 또한 어떻게 이런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었겠는가? 중국 사람이 그를 두고 말하기를 “조선의 임금이 이미 2백 년 동안 지성으로 대국을 섬긴 효과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음 호부터는 “ 임란과 권율(權慄)(1)”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