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 ·논설위원(인문학)
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 ·논설위원(인문학)

 

<본 고는 대구자수박물관 정재환관장이 30여 년 전에 백병풍(白屛風)에서 발굴, 소장해온 국내의 희귀 고문헌자료로서, 조선조 인조2년(1624) 일본에 수신사(修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계영(辛啓榮 1577∼1669)이 그 어떤 정사(正史)에서도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당대의 신빙성 있는 역사고사(歷史故事)를 한자(漢子)원문으로 기록된 고문서를 필자가 직접 국역(國譯)한 자료이다.>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2)

조정에서는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또 잘 싸우는 사람을 얻었으니, 전에 없던 장수의 직을 신설하여, 그 지위를 높여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순신을 삼도통제사를 겸한 순찰사라 부르고, 그 이하가 모두 절제사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공은 국은에 감격하여 밤낮으로 군대를 정돈하고 다스렸다. 또 그 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화친에 대한 논의를 벌이고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계갑(癸甲 : 1593년과 1594년을 이름)부터 병정(丙丁 : 1596년과 1597년을 이름)까지 공격하는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래서 삼도(三道 : 충청, 전라, 경상의 세 도를 이름)의 바닷가 각 고을에서는 해마다 배를 만들어, 5,6년 사이에 새로 만든 전선이 수백 척이나 되었으며, 군량미와 군수물자도 그렇게 준비하여, 수전(水戰)에 대한 대비가 이미 완전히 갖추어졌다. 훈련과 조련도 면밀하고 강력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병신년(1596년) 겨울이 되어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천자의 책봉을 받지 않고, 천자의 사신을 쫓아냈고, 정유년(1597년) 봄이 다가올 때 다시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그리고 석만자 등을 압박하여 큰 규모의 수군이 바다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에 와서 정박했는데, 중간에 수종(水宗 : 멀리 보이는 수평선의 두두룩한 부분)의 파도가 사나워 바다를 건너오기가 매우 어려웠다. 우리가 만약 위험한 바다를 건너 멀리까지 가서 싸운다면 이일대로(以逸待勞 : 편안하게 있으면 서 수고하는 상대를 기다린다는 뜻)의 형세가 저쪽에 있을 것이고, 저들이 만약 위험한 바다를 건너와 싸운다면 이일대로의 형세가 우리에게 있다. 이런 형세에 대해서는 저쪽이나 우리나 모두 잘 알고 있어,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7월이 되었다. 왜적이 드디어 우리나라 사람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어, 이순신이 겁이 많아 싸우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도성에 퍼뜨리게 하였다. 대간에서 그 소문을 듣고 이순신에 대해 논박을 하여 감옥에 잡아 가두고는 원균으로 대신 하게 하고, 전쟁의 기일을 엄격히 지키게 하였다. 원균은 감히 기일을 어기지 못하고 행장을 재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군대를 정돈하여 나아가 싸웠으나, 수종을 넘기도 전에 사람들이 크게 피곤해지니, 용맹하거나 겁이 많은 마음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수고롭고 편안한 형세가 판이하였다. 한참동안 크게 싸우니 장군과 사졸들이 초조하고 목이 타서 마침내는 흩어져 달아나기에 이르렀다. 수사(水使) 이억기(李億祺)가 발을 구르며 뱃머리에 서서 보니 원균의 배가 재빨리 지나가며 분발해서 공격하다 바다에 빠졌다. 최호(崔湖)는 여러 장수들이 붙들어 주는 덕분에 육지에 올랐는데, 왜적들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 들어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죽었다. 원균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싸움에서 패했다는 보고가 도성으로 들어가자 이순신을 옥중에서 나오게 하여 다시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공은 단지 약간의 군관들만을 거느리고 전라도로 가서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7척의 배와 천여 명의 군사를 얻어,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 나루 입구에 진을 쳤다. 적들이 갑자기 이긴 기세를 타고 장차 서해를 치려고 모든 전력을 이끌고 돛을 올리고 오니, 망망한 대양에 바다 빛은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공은 말소리나 얼굴빛이 동요되지 않았다. 당시에 사대부들이 피난을 가는 배가 수십 척이 와서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다. 공이 그 사람들을 모두 불러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저러하니 당신들도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차라리 내 부탁을 들어 주고 내가 크게 싸우는 것을 구경하시오.” 라고 하니 모두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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