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본 고는 대구자수박물관 정재환관장이 30여 년 전에 백병풍(白屛風)에서 발굴, 소장해온 국내의 희귀 고문헌자료로서, 조선조 인조2년(1624) 일본에 수신사(修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계영(辛啓榮 1577∼1669)이 그 어떤 정사(正史)에서도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당대의 신빙성 있는 역사고사(歷史故事)를 한자(漢子)원문으로 기록된 고문서를 필자가 직접 국역(國譯)한 자료이다.>

[일본견문록(1)]

왜적들 중에서는 일본(日本)이 크다. 나의 처형 선석공(仙石公 : 신계영(辛啓榮 1577-1669)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신계영의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영길(英吉)이며, 선석(仙石)은 그의 호이다. 1624년에 일본에 수신사의 종사관으로 다녀왔다.)이 갑자년(1624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대마도를 거쳐 배를 타고 천여 리를 가니, 어떤 갈라져 나온 섬이 있었다. 그 섬을 경유하여 또 천여 리를 가니 대판(大坂 : 오사카)이 나왔다. 성 아래 배가 지나가는 곳이 만황(蠻皇 : 오랑캐의 임금. 곧 일본의 천황을 일컫는다.)이 사는 곳이었다. 그 땅은 평평하게 퍼져 있는데, 정 북쪽으로 궁궐이 높이 솟아 있었다. 수없이 많은 문과 각진 모서리, 금빛 새 장식이 구름 속으로 아득히 솟아 있고, 오색이 찬란하였다. 모두 나무판자로 지붕을 덮었는데, 판자를 이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금꽃을 그리고 그 위에 칠을 하니, 햇빛이 비치면 눈이 현란하여 쳐다볼 수가 없었다. 성문은 크고 웅장하며, 의장(儀仗)이 엄숙한 것이 중국에 천자가 사는 곳도 미칠 바가 아니었다. 민가가 즐비하게 너른 들에 가득하고, 금전벽우가 찬란하였다. 동쪽부터 서쪽까지, 남쪽부터 북쪽까지 높고 낮은 것이 조금도 없고, 들쭉날쭉한 것도 없어, 마치 긴 끈을 펼쳐서 구획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 가운데 있는 길거리는 정 북쪽에서부터 정 남쪽을 향하고, 정 동쪽에서부터 정 서쪽을 향하여, 반드시 직선으로 뻗어 있고 비스듬한 길이 없어, 반듯반듯하게 질서가 있었다. 만황은 높이 앉아 손을 모으고 하는 일이 없으며, 관직을 제수할 때는 관백(關白)이 찾아가 도장을 찍어 주면 그 뿐이다. 비록 반란이 일어나거나 흥하고 망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모두 관백에게 달린 것이고, 만황은 편안하게 있으면서 하는 일이 없으며, 만고(萬古)에 하나의 성씨가 계속 승계한다. 다만 매월 보름 전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지나친 행동을 하고 맘껏 술을 마시는데, 밖에 있는 사람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보름이 지나고 나면 단정하게 손을 모으고 묵묵히 앉아, 눈동자도 돌리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 그믐이 되면 그친다.

그들이 낳은 여자는 시집을 보내지 못하고 과부로 살다가 늙어 죽는다. 중고(中古)시대 이래로는 관백의 아들을 데릴사위로 삼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대판에서부터 육지로 천여 리를 가면 강호(江滸)에 이르는데, 삼면이 바다를 등지고 있고, 물이 얕아 배가 다닐 수 없고, 진흙이 질퍽거려 사람도 발을 붙이지 못한다. 그래서 도적이 쳐들어와 어지럽히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여기가 바로 관백이 사는 곳인데, 이런 지형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걱정을 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길에 일광산(日光山)과 부사산(富士山)이 있었는데, 하늘 높이 솟아 푸르게 빼어나서 볼 만하였다. 또 상야주(上野州)와 하야주(下野州)가 있고, 일본에 속한 근해에 있는 60개의 섬에도 사람들이 즐비하게 살았다.

우리 사신들이 육지로 갈 때, 한 사신이 탄 가마를 50명이 메고서 나는 듯이 달려 잠시 후에 한 역참에 이르렀다. 그들이 말하는 역참은 모두 불사(佛寺)였는데, 크고 웅장하고 화려하여 천하에 으뜸이었다. 불법(佛法)을 받드는 것도 세상에 없는 정도이다. 아무리 죽을죄를 지은 자라 하더라도 절 문에 들어가면 관리가 감히 쫓아가지 못하다. (다음 호에서도 계속 “일본 견문록(2)”에 대해서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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