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기 논개의 진실과 왜곡 Ⅷ  [논개의 죽음에 관한 기록-2]

경남향토사연구회

부회장 松園 최판도

 

 

○ 안민영(安玟英, 1816~ ? )의 『금옥총부(金玉叢部)』(1881)

“논개와 함께 이 바위에 올라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술이 반쯤 취하자 논개가 왜장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니 왜장은 기꺼이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논개가 왜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소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것은 박태무의 글보다 140년이나 더 뒤늦은 것이니까 논개의 죽음에서는 288년이나 지난 다음의 기록이다. 이제 여기서는“바위에 올라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술이 반쯤 취하자”논개가 왜장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니 왜장은 기꺼이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진주성싸움의 참혹함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논개와 왜장이 함께 어우러진 거기에만 마을을 쓰고 상상해나간 결과“술을 마시고 즐기는”데까지 왔다.

○ 사공수(司空燧, 1846~1925)의『한양오백년가(漢陽五百年歌)』(1913)

“잇 마참 왜장드리 쵹셕루에 모여안 논의 인물 듯고 슐먹고 츔을 출”(이때 마침 왜장들이 촉석루에 모여 앉아 논개의 인물 듣고 술 먹고 춤을 출 적에) 이것은 안민영의 글보다 32년이 더 늦어서 논개의 죽음에서는 320년이나 지난 뒤의 기록이다. 여기서는 술을 먹고 춤을 추는 자리를 바위(의암) 위가 아니라 “왜장들이 모여 앉은 촉석루”로 바꾸었다. 왜장들이 모여 앉아 술을 먹고 춤을 추었으니 완전히 흥겨운 잔치를 벌인 것이 되었다. 이로부터 전라북도 유림에서 펴낸 『호남삼강록』(1903)과 통감부 시절 민간에서 펴낸 『초등대한역사』(1908)를 비롯하여 1950년대 뒤로 나타나는 여러 기록들이 이것을 받아들여 되풀이했다.

○장수교육청 ‘의암주논개 낭생장지사적불망비(義巖朱論介娘生長地事蹟不忘碑)’(1960)

“계사년 유월 왜적이 침입하여 진주성이 무너져 여러 장수가 싸우다 죽으니 성 안이 물고기 회를 친 듯하였다. 칠월 칠일 촉석루와 남강 위에 왜적이 승전 잔치를 열자 논개는 의분이 끓어올라 스스로 기생처럼 꾸미고 왜장 입화종무가 몹시 취하여 미친 것 같음을 틈타 일을 꾀했다. 준비한 열 손가락의 반지와 가슴 가득한 열기로 남강 깊은 물에 치마를 둘러쓰고 떨어져서……”

이것은 논개의 죽음에서 367년이나 지난 다음의 기록인데, “칠월 칠일 촉석루와 남강 위에 왜적이 승전 잔치를 열자” 논개의 의분이 끓어올랐다고 했다. 이제는 잔치 자리가 촉석루와 남강 위에까지 벌어졌고, 날짜마저 한 주간이나 지난 칠월 칠석 명절로 바뀌었다. 그리고 장수지역에서는 이것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사실인 듯이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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