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원松園 최판도

경남향토사연구회 부회장

 

우리나라에 사직단은 풍년과 안녕을 기원(祈願)하던 제단으로써 국사단(國社壇)을 국토(國土)의 신(神)으로 국직단(國稷壇)은 오곡신(五穀神)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사직단(社稷壇)을 풀이하면 사(社)는 토지신(土地神)을 말하며 직(稷)은 곡물신(穀物神)을 뜻하며 단(壇)은 토지 신과 곡물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을 말한다.

사직(社稷)은 조선시대의 종묘(宗廟)란 말과 함께 국가 또는 나라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신라 때부터 사직단의 기록이 있다.

조선을 가르켜 오백년(五百年)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394년(태조3년) 조선의 태조가 건립한 사직단(社稷壇)은 높이1m 면적72㎡로 현재 국사단(國社壇)과 국직단(國稷壇)의 위치가 남아있다.

이것은 신라 중기의 단(壇)과 고려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4방 3층의 돌로 꾸몄다.

그밖에 기곡대제(祈穀大祭: 정월 첫 辛日)나 기우제(祈雨祭)도 이곳에서 지냈고 이곳을 관리하기 위하여 사직서(社稷署)를 두었다.

조선의 한양에는 임금이 직접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이 있었는데 이를 관장하는 사직서가 있었고 1897(광무1)년에는 이를 높혀서 태사태직(太社太稷)이라 칭하였다.

지금의 서울 사직공원(社稷公園)은 이 사직단을 중심하여 형성된 곳이며 이곳의 동명(洞名)도 사직동이다.

진주(晉州)의 사직단(社稷壇)은 진주의 수령이 국왕을 대신해 이 지역 농사의 풍요(豊饒)를 기원(祈願)하며 국가적 제사를 올렸던 장소를 말한다.

또한 지방에도 관아의 서쪽 높은 곳에 사직단을 설치하고 지방의 수령들로 하여금 제사를 올리게 하여 국가의 평안과 풍년을 빌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사직단은 뜰 한 가운데에 동서(東西)로 사(社)와 직(稷)이라는 2개의 단(壇)을 나란히 꾸미고 그 주위는 토담으로 둘러싸 부정한 사람이나 짐승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고, 1단 높이의 장대석 기단(基壇) 위에는 정문을 세워 이곳이 성스러운 곳임을 표시했다.

따라서 사직단의 동편의 사단(社團)은 땅을 주관하는 토지 신에게 제사하고, 서쪽의 직단(稷壇)은 오곡을 주관하는 곡물신(穀物神)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을 말한다.

진주의 사직단(社稷壇)을 사단(社壇)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시대 진주목(晉州牧) 지도에도 사직단을 사단으로 표시해 놓고 있다.

그러나 1800년대 말 경남 관찰부 진주군 지도에는 사직단을 다시 본래의 이름인 사직단으로 표시해 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진주 사직단은 조선건국 후 각 지방마다 사직단이 설치 될 때 함께 설치되었는데 지금의 상봉동 일대에 있었던 대룡사(大龍골)와 소룡사(小龍골)의 사찰(寺刹)의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진주의 첫 사직단인 대룡사와 소룡사가 현재로서는 모두 그 흔적마저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단지 진양지(晉陽誌)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진주사직단의 위치가 간략하게 언급되어있는데 이를 통해 그 위치를 추정해 본다.

이 문헌에 따르면 진주 사직단은 진주의 서쪽 오리(五里:봉곡리) 쯤에 있었는데 대롱사 위쪽에 있었다고 되어있다.

또한 이 책에는 소룡사가 사직단의 남쪽에 있었다고 밝혀져 있기 때문에 진주 사직단은 과거 대룡사 소룡사의 중간쯤이 지금의 간호보건 전문대학이나 세광공업고등학교 화인 아파트 중 한 곳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진주 간전은 교가(校歌)에 사직단을 뜻하는 사단(社壇)이란 歌詞를 넣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사직단의 관리는 매우 엄격했는데 사직단에는 입직관원이 배치되어있어 세심한 관리가 이루어졌는데도 진주 사직단은 관리가 부실했다는 입적관원의 보고에 따르면 영조 때 진주 목사 이광박이 사직단을 다시 고쳐 짓기도 했다.

진주 사직단의 규모는 토담 안에 있는 사단과 직단2개를 비롯해 사와 직의 위패(位牌)가 모셔진 3간 건물의 사직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이곳의 제사는 봄과 가을의 정기 제례일이 있었고 가믐이 심하거나 풍년(豊年)을 기원(祈願)할 때는 별도로 기우제(祈雨祭)와 기곡제(祈穀祭)도 지냈다.

진주 사직단에서 춘추제례(春秋祭禮)가 있을 때마다 제수품(祭需品)을 보면 진주 사직제의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1895(고종32년)정월 누룩6원 대추6되, 소금6되, 황촉(큰초)3쌍 축문 종이 1장, 작은 황필2자루 송묵(먹물용)2개, 목향2양, 조을소(條乙所) 10把, 세승(세승)20파 대피지(큰종이)5장 땔감나무6단, 동거(同炬햇불)2자루, 작은 햇불이 6자루 등을 밝혀 놓고 있다.

그런데 500년을 이어 오던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일제의 침략으로 순식간에 끊어지면서 사직단도 훼손되기 시작되면서 대표적으로 서울의 사직단과 광주의 사직단을 훼손하여 일본인의 도시공원으로 개조하였던 것이다.

해방 후 서울과 광주에서는 사직단을 복원 했지만 아직도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 졌으나 이후 진주시민들의 정성으로 2013년11월4일부터 옛 사적지의 흔적(痕迹)과 사료(史料)를 찾아 진주 사직단 복원을 위해 추진위원을 구성했고, 2018.2.28 문화재 심사위원회에서 심사를 실시하였고. 경상남도 행정예고 2018-418호 의견제출, 2018. 8. 9경상남도 문화재 기념물 291호로 지정고시. 10.26. 진주 사직제 보존회 주관으로 진주사직제를 봉행하고 있다.

참고: 오곡(五穀): 백곡(百穀), 구곡(九穀) 육곡(六穀) 오곡(五穀)으로 혼용되었으나 한(漢)나라 때 오곡이 정착, 천관질의(天官疾醫)에 대한 정현(鄭玹)의 주석에 오곡은 마서(麻黍) 직(稷:피) 맥(麥) 두(豆)로 하였고 맹자의 승문공상(勝文公上)의 조기(趙岐)의 주석에는 도(稻:벼) 서직맥숙(黍稷麥菽)라고하고 이후 오곡은 벼, 보리, 콩, 밀, 메밀, (기장,피,팥 등)에서 5곡을 택하여 오곡이라 하였다.

2023년 제9회 진주사직제 봉행 광경
2023년 제9회 진주사직제 봉행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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