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농단한 심유경과 고니시
정유재란의 불씨를 당기다...

백성의전쟁 황석산성대첩 (2)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이 제안한 7개 조항에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데리고 오라’했음에도 같이 오지 않아 조선통신사 일행은 만나주지 않고 명나라사신들만 접견했다. 사진=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이 제안한 7개 조항에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데리고 오라’했음에도 같이 오지 않아 조선통신사 일행은 만나주지 않고 명나라사신들만 접견했다. 사진=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일본이 정유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조선 8도 중 남쪽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4도를 분할하여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1차 임진전쟁 때 최초 16만에서 20만 여 병력으로 추가 후 승승장구하여 평양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조선 겨울의 맹추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몸서리를 쳤다. 또 부산에서 평양까지 1,700여리에 이르는 보급로 유지에 10만 병력이 쓰여 전투 병력은 공격군 5만여 명에 불과해 공격은커녕 방어도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당시 일본 국력으로는 전쟁을 지속하거나 조선을 굴복 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일본군 실상은 1593년 평양에서 철수 후 일본군 사기회복을 위한 2월12일 행주산성 전투를 실패하고, 3월3일 서울에서 일본군 17장회의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이시다 미스나리(石田三成)의 보고서(“부산에서 식량이 도착하려면 10일이 더 걸리고 죽을 먹으면 4월11일까지는 버틸 수 있다. 수만 조, 명연합군 공격은 방어만 가능하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일본군은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으려 끈질기게 요구해 4월18일 포로로 잡힌 두 왕자와 대신 일행, 조선백성 1천 여 명을 앞세웠다. 그리곤 일본군 5만3천명이 서울을 나와 한강부교를 건너 남으로 철군을 시작, 20일에는 전군이 한강을 건넜다. 유성룡, 권율 등이 추격전을 지속적으로 주장했으나 이여송이 반대를 하여 끝내 추격 작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본군들은 납치한 조선인들에게 춤과 노래를 시키며 하루 30내지 40리씩 남하하는 해괴한 패퇴를 했다. 그리해 일본군은 5월10일 상주, 12일 선산, 15일엔 대구와 청도 밀양에 도착했다.

만약 유성룡과 권율이 게릴라전에 능한 곽재우에게 지방 의병들을 동원, 기습 공격을 하게 했더라면 일본군은 진주성 전투를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진='홍의장군'
만약 유성룡과 권율이 게릴라전에 능한 곽재우에게 지방 의병들을 동원, 기습 공격을 하게 했더라면 일본군은 진주성 전투를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진='홍의장군'

 

만약 유성룡과 권율이 지방 의병들을 동원해 소수 병력으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에 유능한 곽재우 등에게 기습 공격을 하게 했더라면 일본군은 진주성 전투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20여만 명에서 5만3천 여 명으로 완벽하게 궤멸된 일본군을 끝까지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에선 조선군 지휘관들의 전술능력이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반대로 패퇴하는 중에도 군인들의 떨어진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문화선전대를 운영한 일본군의 능력은 현대전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고차원이었다.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명나라 허락을 받아 일본군을 추격하려 한 당시 조선 왕과 대신들, 군 지휘관들의 무책임한 생각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백성을 버리고 배반한 군주를 어찌 믿고 의지할 것이며, 그런 군주를 위해 고생하고 죽음까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일본군은 상대적으로 짧아진 보급로에 투입됐던 병력을 공격군으로 전환해 진주성 대병으로 투입, 6월22일부터 29일까지 8일에 걸친 2차 진주성전투에서 승리해 사기를 회복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자신감을 얻었고 가시화된 4도 분할 가능성 아래 정유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조선조정은 명나라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황신(黃愼)을 정사로, 박홍장(朴弘長)을 부사로 한 조선통신사 309명을 편성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심유경을 따라 이순신이 제공하는 판옥선을 타고 8월4일 부산을 출발, 오사카로 갔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제안한 7개 조항에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데리고 오라’했음에도 같이 오지 않아 조선통신사 일행은 만나주지 않고 9월2일에야 명나라사신들만 접견했다. 외교문서 자체가 고니시와 심유경의 속임수였기 때문에 조선통신사들은 7개 조항은 고사하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왜 면접을 거절하는지도 몰랐다.

히데요시가 50여 장령들을 배석시킨 뒤 명나라 사신들을 엄숙히 맞았다. 명나라조정에는 히데요시가 항복한 것으로 하고 히데요시에게는 명나라사신과 수 백 명 조선통신사를 불러 적당히 체면을 세워줌으로써 무모한 침략전쟁을 끝내려 심유경과 고니시가 4년여에 걸친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런 줄을 모르는 히데요시는 자기가 제안한대로 조선 4도가 들오는 줄 알고 만족하며 신종황제의 강화조약이 아닌 고명(誥明)을 받고 크게 잔치를 벌였다. 잔치 끝에 기분이 좋아진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일곱 원로 장령들과 글을 아는 중 승태(承兌)를 시켜 읽어보라고 했다. 물론 고니시는 승태에게 히데요시의 뜻과 어긋나는 부분은 적당히 꾸며 읽으라고 비밀리에 손을 써두었다. 하지만 승태는 곧이곧대로 읽어버렸다. 히데요시가 들어보니 기절할 내용이었다.

명나라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조선조정이 편성한 조선통신사 309명은 심유경을 따라 이순신이 제공하는 판옥선을 타고 8월4일 부산을 출발, 오사카로 갔다. 사진=조선통신사래조도,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명나라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조선조정이 편성한 조선통신사 309명은 심유경을 따라 이순신이 제공하는 판옥선을 타고 8월4일 부산을 출발, 오사카로 갔다. 사진=조선통신사래조도,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그 내용에는 7개 조항은 오간 데 없고 “명나라공주를 첩으로 받아들이고 조선 4도를 분할한다” “너를 일본국 왕으로 봉한다” “내가 국왕이 되려면 그대로 하면 됐지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을 것이 무엇인가?” 같은 말들이 적혀있었다. 이에 히데요시는 몹시 노해 길길이 날뛰며 유기나가와 사신들을 모조리 죽이려했다. 이를 본 이시다미쓰나리(石田三成), 오오타니요시츠쿠(大谷吉繼), 마쓰다나가모리(增田長盛) 등 이른바 3봉행(奉行) 원로급장령들은 사신은 죽이는 게 아니라 변명하고 히데요시를 겨우 말려 진정시켰다.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히데요시가 그래도 미련이 남아 강화조건을 조선과 직접 교섭하면 어떻겠느냐고 고니시에게 물었다. 혼이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진 고니시가 얼떨결에 “말로 할 게 아니라 전투로 해야 합니다” 강경론을 펼쳤고, 옆에 있던 기요마사가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 전쟁이다.” 결국 히데요시는 두 나라 사신을 퇴거시키고 재침을 명령했다. 일단 무력으로 조선을 점령하고 강화회담을 통해 자신의 7개 조건을 관철시키리라 판단한 것이다. 공격목표는 1차 전쟁 때 실패했던 전라도에 두기로 했다.

퇴거를 당한 명나라 사신일행은 12월21일 부산에 도착했고 조선통신사 일행은 조정에 보고했다. 강화가 깨지고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은 정명원(鄭明遠)을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 조정에 알리고 응원군의 재출동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정유재란, 게이죠의 역(慶長の役)의 불씨는 당겨졌다.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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