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地名由來 ◎

화동(花洞):화봉산(花峯山)은 지리산의 주령으로 정촌면의 주된 산이다. 옛부터 당계라 불렀다고 하는 이 산은 자생하고 있는 진달래,연지, 들란초, 복숭아꽃, 살구꽃, 백일홍 등이 만발하였던 곳이라하여 마을이름을 꽃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딱박샘: 마을이 생긴 때부터 있는 우물이다. 돌로 네모나게 쌓아 위에는 덮개(뚜껑)가 있고 앞면만 1평방미터 정도 열려 있어 물을 바가지로 퍼 올려 사용한다.

높은한질: 모심(慕心)마을과 목과(木果)마을 사이에 위치한 화봉산(花峯山) 고개로 비가오면 물이 사방(四方)으로 흘러가는 분수령으로 남은 사천만 북은 남강으로 흐른다 하여 높은한길이라 이름 붙였다한다.

화원(花園):1988년 화동(花洞)마을에서 분리된 취락마을로 대축리, 화개리, 진주시내 등지에서 이주한 사람들로 각성(各姓)이고 4392세대이며 농가호수는 18호이고 대부분이 공무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티골: 높은한질 막사에서 쉬어가는 원님의 말을 매었다는 곳으로 높은한질 남쪽 약100m 지점이며 정촌면 화개리 150번지이다.

장승백이: 옛날 이정표가 있던 곳으로 동쪽으로는 통영, 서쪽으로는 하동으로 가는 갈림길이었다.

매동(梅洞): 씨족은 진양강씨가 약 450년전부터 살아왔는데, 그 이후 한씨, 구씨, 최씨, 허씨, 김씨, 이씨, 정씨, 신씨, 양씨, 배씨, 민씨 등 45세대로서 강씨가 25세대로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서재골: 마을 오른쪽에 옛날 공부를 하던 서당이 있었다. 하여 일컫는 말이다. 일제강점때에는 마을옆에 정촌초등학교가 있었는데 18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개양(開陽:호탄동)으로 이전하였는바 지금 정촌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모심(慕心): 원래 진양강씨가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웃어른을 섬기는 것을 제일로 여겨 심성을 좋게 기른다는 목적에서 사모할모(), 마음심()자를 따서 모심(慕心)이라 하였다 한다.

죽봉(竹鳳):시초에는 마을이름을 죽방(竹坊)이라고 불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대밭에 봉이 왔다하여 마을명칭을 죽봉(竹鳳)이라 하였다한다. 진삼선 철도가 마을 중심을 통과하고, 북쪽에 죽봉터널이 있으며, 아래쪽에는 죽봉저수지가 있다.

관봉리(官鳳里):1914년에 진주군 지공면 여물동(枝貢面汝勿洞), 상동(上洞)과 사천군 북면 관율동(北面官栗洞) 각 일부를 통폐합하여 관봉리(官鳳里)라고 하였다.

봉동(鳳洞): 진주시의 관문인 개양역(開陽驛)에서 동쪽으로 8km에 위치한 관봉리 3개마을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오지 마을이다. 앞산이 봉()새를 닮았다하여 새밭골이란 안동네와, 앞산너머 봉새가 지나왔다하여 묵은 새밭골이 있다.

소곡리(所谷里): 1914년에 구한말 때의 진주군 지공면 소곡동(枝貢面所谷洞), 상동(上洞)과 사천군 북면 관율동(北面官栗洞) 각 일부를 통폐합하여 소곡리(所谷理)라고 하였다.

예상리(禮上里):1914년에 구한말때의 진주군 가차례면 상동(加次禮面上洞)예상리라고 하였다.

예하리(禮下理): 1914년 구한말 때의 진주군 가차례면 상동과 하동을 통폐합하여 예하리라 하였다. 딸린 마을로는 강주, 강서, 목과 등 3개 동이 있다. 이 중 강주는 신라 경덕왕16(757) 이래로 전해져온 진주진양의 고호일 뿐더러 조선조 전기 이래로 진주목 남면 세곡리에 딸렸던 곳으로서 영터와 더불어 매우 오래된 지명인 것을 알게한다.

강주(康州):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기원전 2천년경 이전인 상고시대부터 서부경남의 중심지로서 문화의 터전임을 짐작하게 된다.

강주못(康州池): 일명 강주연못, 강주못은 본시 강주의 영터라고 전한다. 조선조 전기때의 지명으로서 진주목 남면의 세곡리에 강주가 보이거니와 진양지에 의하면 하 륜은 그의 촉성성 성문기에서 기미년(1379) 가을에 지밀직 배공이 강주진장으로 와 있으면서 목관에게 이첩하여(촉성성이) 흙으로된 것을 돌로써 쌓게 하였더니 역사가 반도 되지 못하여 왜구에게 함락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곳이 고려말 우왕5(1379)에 배극렴이 진을 치고 있던 영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대축리(축리): 1914년에 구한말 때의 진주군 축동면 대동을 대축리라고 하였다.

대방(大芳): 유래는 골짜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20여 년 전 산지를 개간하다 발견된 고래장터, 사기그릇 등으로 보아 약 5백 년 전부터 거주한 것 같다.

함촌(咸村): 전설에 의하면 함안고을 원이 살았다 하여 함안촌이라 하였는데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다.(진양지에 의하면 옛 지명에 함안촌이 있었다). 400여년 전 의령군 가예면 부근에서 밀양박씨가 피난을 와 정착하면서 신안주씨와 의형제를 맺고 살았는데, 그 후손들과 서씨, 황씨, 최씨, 정씨 등이 살고 있다.

심대(深大): 유래는 옛날 심판사 세력하에 있다가 서울에 가고난 후, 구암 이정선생의 입산을 계기로 하여 마을 한복판에 수백 년 된 포구나무가 있어 포구정이라 칭하였다 한다.

향토사학자 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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