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기오
교육학 박사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실학(實學) 사상의 형성-발전기는 영조~고종(1725~1876) 때이다. 조선은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으로 정치적 혼란이 생기고, 임진-병자 양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에 대한 반성과 문제 해결을 위해 실학사상(實學思想)이 등장하게 되었다.

실학사상은 공리공담에 치우친 허구적 학문연구 방법을 지양하고, 경학·서학·북학 등을 수용함으로써 실생활에 입각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였다. 실학자들은 당시의 피폐한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제도를 구상하였다. 즉 청조(淸朝)의 고증학(考證學)과 서학(西學)을 수용하여 문제 해결을 구상하게 되었다. 기존의 경전과 중국의 사서를 중심으로 생활에 유용한 교육과 역사나 문학 교육을 주장하였다.

실학 교육의 특징은 이용후생(利用厚生)과 경세제민(經世濟民), 그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천이다. 공맹(孔孟)의 도덕 세계를 목표로 설정하고, 경세제민의 學으로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학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의 역사와 지리, 문물과 풍토를 연구하고, 외국의 문물제도들 중 우수한 것은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실학자들은 특히 중국에서 수용하고 있는 서구의 신문화를 수용하고자 하였으며, 청조(淸朝)의 학풍과 고증학(考證學)을 연구하였다.

실학이 사회적으로 추구했던 ①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은 상공업을 발전시켜 부흥을 꾀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새로운 문예운동도 전개하였다. ②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천은 기존의 비생산적이고 관념론적인 학문 풍조를 정치경제적인 현실 문제로 방향을 전환시키려고 노력 하였다. ③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천은 객관적인 사실들을 밝혀 민족문화를 앙양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대표적인 실학 교육 사상가는 유형원(1622~1673), 이익(1678~1752), 정약용(1762~1836)등이다. 유형원(1622~1673)의 대표적인 주장은 농민에게 일정 면적의 토지를 나누어 주고, 제도들을 개혁해야 한다는 균전론(均田論)이다. 인조반정 때 부친이 죽고, 왜란과 호란으로 완전히 파탄 난 나라를 보면서 관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여지지(輿地志)라는 지리서를 작성하였고, 통치제도에 관한 명저 반계수록(磻溪隧錄)도 완성하였다.

이익(1678~1752)은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남인으로 아버지의 유배지에서 태어나 학문에만 주력하였다. 그의 사상은 정약용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형이 당쟁에 휘말려 처형당한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과거를 단념하고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끝까지 사양하였으며, 1척(尺)을 100리(里)로 1촌(村)을 10리(里)로 하는 대축척 지도로 자연 지리의 정확성을 높였다.

정약용(1762~1836)은 출중한 학식과 재능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신유사옥 때 전남 강진에 유배되어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경험과 학문적 연구를 바탕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이다. 세상(世)을 다스리는(經) 지혜를 임금에게 고한 경세유포(經世遺表)와 수령이 부임해서 떠날 때까지 지켜야 할 덕목을 12부에 걸쳐 자세히 적은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을 통해 실현 가능한 방안을 제시하였고, 홍역과 천연두의 치료법을 저술하였으며, 도량형과 화폐의 통일을 제안하였다. 건축에 사용되는 거중기(擧重機)도 고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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