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교방가요

진주의 논개(論介), 평양의 계월향(桂月香)으로 인해 ‘남 진주, 북 평양’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에 위암 장지연(張志淵)은 진주의 정경과 문화를 노래한 「진양잡영(晋陽雜詠)」 14수를 연재하면서 “풍부한 물산(풍산, 豊産), 아름답고 요염한 기녀(연기, 娟妓), 무성한 대나무(죽승, 竹蠅)를 진양삼절(晋陽三節)”이라고 했다.

일찍이 이능화(李能和)는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지방에 따라 나름의 특색이 있었는데, 평양기생이 그 숫자나 기예에서 가장 으뜸이었고, 다음이 진주기생으로 나와 있다. 의절 논개 말고도 역대 진주기생으로는 승이교(勝二喬)·계향(桂香)[또는 난향(蘭香)]·매화(梅花), 그리고 진양의 옥선(玉仙) 등이 빼어난 명기(名妓)들이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진주에는 기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는데, 『조선해어화사』 등에 ‘진주기생’에 대한 기록들이 보인다.

[고려가요 월정화의 주인공 ‘월정화’]

월정화(月精花)는 기록상 나타나는 진주의 최초 기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진주 사록(司錄) 벼슬에 있던 위제만(魏齊萬)을 유혹해 그의 부인을 결국 울화병으로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사록은 당시 진주 행정의 실무 책임자라고 보면 된다.

『고려사』권71권 악지에 “월정화는 진주 기녀이다. 사록 위제만이 그에게 매혹되었다. 그래서 그의 부인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그만 죽었다. 진주 고을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부인이 살았을 때 서로 친애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어 사록이 여색에 미친 듯이 미혹됨을 풍자한 것이다(月精花 晋州妓也 司錄魏齊萬惑之 令夫人憂恚而死 邑人追言 夫人在時 不相親愛 以刺其狂惑也)”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진주 사람들이 「월정화」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노래는 전하지 않는다.

진주 사람들이 위제만의 부인을 추모하고 위제만의 허랑방탕한 생활을 풍자하기 위해 불렀다는 「월정화」라는 고려가요의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진주난봉가」의 내용과 흡사한 측면이 많을 것이라고 추측은 해볼 수 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월정화의 이야기가 「진주난봉가」의 설화적 배경과 유사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고려사』의 ‘월정화’이야기는 이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임하필기(林下筆記)』 등 조선시대 기록들에도 나타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사학자 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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