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목 관아의 기녀로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되던 계사년(1593) 6월 29일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의암, 義巖)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 죽은 순국의 여인이 논개이다.

논개의 사실을 맨 먼저 기록한 이는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다. 그는 인조반정 후 양주 서산에 숨어 지내다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에 얽혀서 아들과 함께 서인 정권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젊어서부터 보고 들은 바를 즐겨 글로 적었고, 모함에 걸려 죽기 세 해 앞에 그것들을 묶어 『어우야담(於于野譚)』(1621)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의 맨 앞 「인륜편」 ‘효열’대목에 논개에 관한 사실이 실렸다.

논개가 순국하던 계사(1593)년 여름에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 다음 임금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관청)에서 문학(정5품)으로 광해군의 교육을 맡고 있다가 그해 가을 광해군을 모시고 쑥대밭이 된 삼남(충청·전라·경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광해군은 무군사(撫軍司 : 군사를 어루만지는 관청)를 이끌고 수원과 공주를 거쳐 동짓달에는 전주에 머물면서 왜란으로 고난을 겪은 군사와 백성을 위로하였다. 섣달에는 특히 진주(晋州)와 금산(錦山) 싸움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사연을 책으로 엮어 시강원에 내리고, 살아남은 가족들을 불러 나라의 면역첩(免役帖 : 부역을 면제한다는 증명서)과 쌀과 콩을 내려 위로하도록 했다.

광해군이 이렇게 현장으로 다니며 직접 목격한 백성들이 겪은 참혹한 사실의 자료를 모으는 책임을 유몽인이 맡았다. 그는 삼도순안어사(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돌아다니며 살피는 임금의 사신)라는 이름을 띠고 왜적이 휩쓸고 간 곳곳을 다니면서 살피고 사실을 적어서 세자에게 드렸다. 그의 문집인 『어우집(於于集)』에는 「세자께서 암행하라 하시어 보성을 지나다가 진사 신여훈을 만나」라는 제목으로 지은 시가 있으니, 삼도순안어사로 남해안을 다니며 백성들의 아픔을 살피고 자료를 모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지난해(임진)에는 대첩(大捷)을 거두어 왜적을 물리쳤고, 올해(계사)에는 성 안에 있던 육만의 군사와 관리와 백성이 모두 목숨을 바쳐 싸운 진주에도 몸소 찾아왔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유몽인이 진주를 찾아왔던 동짓달은 논개와 진주성 사람들이 목숨을 바친 지 겨우 너 댓 달이 지난 때였다. 진주성싸움의 참혹한 모습이 살아남은 사람들 머리와 가슴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을 것이다. 유몽인의 기록은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적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유몽인이 한문으로 적은 논개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 만력(萬曆) 계사년에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의 장수로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맞서 싸웠다.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얼굴과 매무새를 아리땁게 꾸미고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 위에 서 있었으니, 바위 밑은 바로 깊은 강물 가운데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여러 왜병들이 바라보고 좋아했지만 모두들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는데, 홀로 한 장수가 나서서 곧바로 다가왔다.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니 왜장도 그를 꾀면서 끌어당겼다. 드디어 논개가 그 허리를 끌어안고 물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임진왜란 때 관기로서 왜적을 만나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논개 한 사람뿐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거의 잃어 버렸다. 저들 관기는 음탕한 창녀들이라 곧고 맵다(정렬, 貞烈)고 일컬을 수가 없다지만,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또한 거룩한 임금의 교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의 하나가 아닌가? 차마 나라를 저버리면서 왜적을 따르지 않았으니 충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서글픈 일이로다.”

이 기록에서 보다시피 유몽인의 기록은 두 단락이다. 앞 단락은 논개의 죽음을 사실로써 간추려 적었고, 뒤 단락은 유몽인이 스스로의 생각과 느낌을 덧붙여 적었다. 그런데 논개의 사실을 적은 앞 단락의 내용은 죽음의 순간만을 서술하고 있으며, 논개의 일생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논개의 죽음이 남달리 눈부셔서 그것이 그의 일생 모두를 가려버린 것일 수도 있지만, 자취도 없이 사라질 하찮은 일생을 눈부신 죽음이 건져 올린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몹시 간추려진 탓에 앞뒤 사정에 궁금한 구석이 적지 않아서, 지난 4백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논개의 죽음을 놓고 나름대로 상상을 펴나갔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사학자 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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