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소리의 산실 진주 교방(敎坊)과 권번(券番)]

진주의 소리는 진주지역의 교방을 중심으로 전승되던 가곡, 시조 등 소리와 동편제를 중심으로 한 판소리를 말한다.

진주는 일찍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토착부호들이 많아 전통문화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문화가 성행했다. 또한 진주는 역사적으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여서 일찍부터 교방이 설치되어 관 주도의 문화가 전파되었고, 가무가 발달하여 많은 명창이 배출되었다.

진주는 신라시대부터 서부경상남도의 중심지로서, 문무왕 5년(685)에 거열주로 자리 잡은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인 1925년까지 오늘날의 도청격인 기구(예를 들면 감영, 선화당 등)가 설치된 기간이 500년이 넘었다.

진주교방에 관한 기록은 진주목사를 지냈던 정현석(鄭顯奭)[재임기간 1867~1870]이 찬한 『교방가요(敎坊歌謠)』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총목(總目)과 무(舞)로 나누었는데, 총목은 우조(羽調)·계면(界面)·잡가(雜歌)·시조(時調) 부분으로 되어 있고, 무는 육화대(六花隊)·연화대(蓮花臺)·헌선도(獻仙桃)·고무(鼓舞)·포구락(抱毬樂)·검무(劍舞)·선락(船樂)·항장무(項莊舞)·의암가무(義巖歌舞)·아박무(牙拍舞)·향발무(響鈸舞)·황창무(黃昌舞)·처용무(處容舞)·승무(僧舞)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각 지방의 감영에 설치되었던 교방과 관기(官妓)에 관한 제도는 1905년 제도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진주에도 교방과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진주의 관기들은 생업을 위하여 기생조합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나 경영이 부실하여 해산된 것을 당시 경찰서 경부인 최지환(崔志煥)이 주도하여 기생학교인 권번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다가 1939년에는 자본금 5만원으로 주식회사 예기권번의 창립을 하여 초대 사장에 최지환이 취임하였으며, 1940년 당시에 기생 100여명과 견습생 5~60명으로 가무·음곡·산수·국어·예법·고전시조·가야금·유행가·수신·산수 등을 3년간 교육시킨 후 기생 자격을 부여하였다. 1939년도의 총수입이 13만여 원에 달하였다 하는데, 이로써 당시 기생들의 활동규모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판소리는 19세기에 성행하였는데, 기록에 의해 전해지는 판소리는 장끼타령·변강쇠타령·무숙이타령·배비장타령·심청전·흥보전(박타령)·토별가(수궁가, 토끼타령, 별주부타령)·춘향전·적벽가(화용도)·강릉매화전·숙영낭자전·옹고집전 등의 12마당이며, 현재는 춘향가·심청가·흥보가·토별가·적벽가의 5마당이 완창 되고 있다.

이러한 소리에는 가락의 성향에 따라서 동편제·서편제·중고제·호궐제가 있으나, 주로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뉜다. 동편제는 우조 계통으로 굵은 소리인 호령조가 많고, 초성이 진중하고 끝은 된소리로 마무리하는 것이 많아 웅건청담(雄健淸淡)하여 남성적인 성향이 강하다. 주로 섬진강 동쪽 지역인 남원·순창·곡성·구례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서, 가왕으로 일컬어지는 운봉 출신의 송흥록(宋興祿)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반면, 서편제는 계면조 계통으로 끝마침에 있어서 늘어지는 특징이 있고, 장단은 엇붙임이라 하여 기교적인 리듬을 사용하고, 발림이 매우 발달하였다. 주로 섬진강 서쪽 지역인 광주·나주·담양·화순·보성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 순창 출신이며 보성에서 말년을 보낸 박유전(朴裕全)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향토사학자 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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