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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박인호 작사 작곡)에 나오는 가사에 보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장군의 말씀을 받들자” 라는 가사가 있다. 또 해방직후 나온 동요<최영 장군>(최태호 작사, 나운영 작곡)에는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라는 가사가 있다.

동요는 분명 최영 장군의 어버이가 이르신 말씀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청렴결백의 대명사로 들어온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과연 최영 장군의 말인가 아니면 그 어버이의 말인가?

정답은《고려사》<최영열전>에 나와 있다. “최영의 나이 16세때 아버지가 죽을 무렵에 훈계하기를, ”너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하였다. 최영은 이 말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재물에 관심 두지 않았으며 거처하는 집이 초라하였으나 만족하고 살았고,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하여 간혹 식량이 모자랄 때도 있었다”고 나와 있다. 그 《고려사》에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최영 장군이 아니라 장군의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라고 분명히 쓰여 있는 것이다. 최영 장군의 아버지 최원직은 청요직으로 일컬어지는 사헌부 규정(糾正)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조선정조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홍량호가 쓴《해동명장전》과 개화기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신채호가 쓴 위인전《동국거걸 최도통전》에 같은 내용으로 실려 있다. “최도통이 어릴 때에 원직이 무릎 위에 안고 그 이름을 불러 이르기를 ‘영아, 너는 나라를 집과 같이 사랑하라. 너는 황금을 돌과 같이 보아라. 나랏일이 날마다 글러짐은 모든 세상 사람이 황금만 사랑하는 까닭이다” <최도통전>의 해당 대목이다.

최영은 고려 무신정권 때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낸 최유청의 5대손 권문세족으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5대 가문의 하나였으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우왕을 궁궐에서 내 쫓을 때 함께 내쫓긴 우왕의 영비가 바로 최영의 딸이다.

장군 아버지의 유언이 장군의 말로 와전 된 것은 최영의 ‘청렴결백’을 강조하다 보니 생긴 의도하지 않은 왜곡이라 할 수 있겠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삼일절 노래>도 3.1운동은 기미년 3월 1일 정오가 아닌 오후 2시다. 《세종실록지리지》50페이지 셋째 줄 <독도는 우리 땅> 노래 가사도, 독도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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