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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포석정에서 패하고 백제는 낙화암에서 멸망했다”고 조선 세종이 말했을 정도로 포석정은 망국을 앞둔 천년 왕국 신라의 나태와 해이를 상징하는 향략의 놀이터로 각인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포석정은 역대 신라 왕들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며 놀았던 풍류의 장소이자 치욕의 현장이다.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들이닥쳤을 때 이곳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던 신라 경애왕은 견훤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왕비와 궁녀들은 능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놀이터가 아니라 제사터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성스러운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다,

첫째: 견훤이 쳐들어온 것은 927년 음력 11월 이었다. 한겨울에 추위 속에서 과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놀이를 했을까?

들째: 경애왕은 사태의 급박함을 깨닫고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한 상태였다. 견훤의 군대가 경주에서 불과 25킬로미터 떨어진 고울부(지금 경북영천)까지 육박한 상황에서 잔치를 벌였을까?

셋째: 포석정은 경주 남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경주 남산은 절이 130여개, 불상과 탑이 400여기가 들어서 있는 일종의 불교 성지다. 더구나 포석정 주변에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내려오는 우물인‘나정’.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이 태어났다는 우물’알영정‘. 신라 초기 왕들의 무덤인 오릉 등 중요한 유적지이다. 따라서 포속정은 그 위치로 보아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라 유적지와 걸 맞는 제례지였을 것이다.

《삼국유사》<기이편> ‘처용랑 망해사조’에 “왕이 포속정에 행차했더니 남산의 신이 임금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즉 신과 왕의 교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포속정은 필경 제사를 드리는 장소이거나 제사와 관련된 장소였을 것이다.

필사본《화랑세기》에는 포속정이 포석사(鮑石祠)로 기록되어 있다. 사(祠)는 사당, 곧 제사를 드리는 곳을 뜻한다. 포석사에는 화랑 문노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으며, 훗날 태종무열왕 부부가 결혼식을 올린 곳도 포석사라고 《화랑세기》는 말한다.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제사의례의 일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뜨워 놓고 물 따라 흐르던 술잔이 문득 멈추면 술 석잔을 단숨에 마신다는 놀이를 유상곡수(流觴曲水)라 하는데, 이는 본래 제사의례의 일부였다. 중국 저장성 소홍에 가면 명필 왕희지가 유상곡수를 했던 난정(蘭亭)이란 정자와 유상곡수 터가 남아 있다. 일본에도 가고시마의 선암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유상곡수 터가 있다.

또 유상곡수가 아니라 진흥왕 때 토속신앙과 불교의식의 결함된 11월에 열리 팔관회였다는 주장이다. 팔관회든 유상곡수든 경애왕은 극가의 흥망위급상황에 기원을 드리러 간 것이었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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