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바로알기-10

일제 강점기의 국문학자 김태준의 《조선소설사》에서 《홍길동전》의 지은이는 허균이라고 밝힌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홍길동전》은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비판하는 사회 소설이자 최초의 한글소설로 의심 없는 주목을 받아왔다. 그 근거는 허균보다 열다섯 살 아래인 택당 이식의 문집《택당집》별집에 실린 다음 한 구절이었다. “허균은 또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을 짓기까지 하였는데... 허균 자신도 반란을 도모하다가 복주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귀머거리 벙어리보다도 더 심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1960년대부터 제기되었다.

《택당집》별집은 이식이 죽은 지 27년 뒤에 이식의 제자요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 스승인 이식의 집 안에 남아 있던 글들을 추려 교정 편집한 것인데, 이 글을 《택당집》에 넣은 데는 어떤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한 때는 스승이었으나, 역모죄로 처형을 당한 허균과의 선을 긋기 위한 글이라는 주장이다.

문제의 글 말고는 《홍길동전》을 허균이 썼다는 것을 입증할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허균은 명문 양천 허씨 집안으로 형 허봉, 누이 허난설헌과 더불어 당시의 유명작가 3남매였다. 허봉은 유배 갔다 풀려나면서 객사했고, 허난설헌은 불행한 결혼생활로 요절했고, 허균 자신은 역모죄로 저잣거리에서 처형당했다.

허균은 역모죄로 체포되기 전날 밤 자신이 엮어둔 문집《성소부부고》를 딸네 집으로 보냈다. 제목 ‘부부覆瓿’는 ‘장독이나 덮기에 알맞을 정도로 하찮다‘는 뜻이다. 외손자 이필진은 52년이 지난 1670년에 세상에 내 놨다. 하지만 살아남은 허균 본인이 직접 만든 문집에도 역시《홍길동전》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없다.

현전하는 《홍길동전》은 경판본 등 여러 판본이 있는데, 그중 경판본이 시대가 가장 앞선다. 여기에 ‘장길산’이 등장한다. 《홍길동전》의 가장 유명한 대목,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호소 부분이 나온다. 여기에 “옛날 장충이 아들 길산은 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열세 살에 그 어미와 헤어져 운봉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은 끝에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겼답니다.” 장길산은 숙종 때 실존했던 광대출신 도적으로 허균이 죽은지 80여년 뒤의 사람이니 허균이 직접 쓴 소설에는 등장할 수가 없다.

또 《홍길동전》의 무대가 세종시대로 삼고 있는데, 홍길동이 조선을 떠나면서 왕에게 대동미를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세종치세에는 대동법이 실시되지 않았던 시대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홍길동전》은 허균이 쓴 게 아니라, 훨씬 나중에 관련자들이 가필, 개작 혹은 윤색된 것이라는 얘기다. 그 시기는 대략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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