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선인의 풍속-19

조선 태조 5년(1396) 12월 3일. 태조 이성계는 대마도 정벌을 명한다. 이 일을 《왕조실록》은 ‘병자동정’이라 적었으나, 이성계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재위 18년 만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지만, 병권만은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그것은 국방의 중요성 보다 실제는 대마도 정벌이라는 부왕의 유지를 받들기 위함이었다.

⦁세종1년(1419) 5월 14일. 상왕 이방원은 드디어 대마도 정벌을 명한다. 명장 이종무를 원정군의 총사령관격인 ‘삼군도체찰사’로 삼았다. 원정군의 규모도 그 당시로는 어마어마하게 병선이 227척, 병력은 1만7천285명이었다. 선단과 병력은 거제도의 ‘견내량’에 집결했다.

⦁6월 19일 사시(오전 10시경). 이틀 전 폭풍우로 재 출정을 하는 선단과 병사들을 정비하고 다시 대마도를 향해 거제도를 떠났다. 이때의 대마도 정벌을 ‘을해동정’이라 하며 ‘을해동왜역’이라고도 한다. 이종무는 정탐상륙을 위해 10척의 배를 대마도 연안으로 접근시켰는데, 뜻밖에도 대마도의 도민들이 조선선단을 왜구의 배로 착각하고 손을 흔들며 환영으로 맞이했다. “아이들과 부녀자는 살상하지 마라” 절제사 박실이 소리치자 대마도 도민들이 도주하자 쉽게 대마도를 점령했다.

⦁조선원정군은 이때 왜구의 배129척 중 20여척을 남기고 모두 불태웠고, 가옥 1천939동을 불태웠으며, 목을 친 왜구의 수 114명, 생포21명의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道都熊瓦) 패잔병을 거느리고 게릴라전으로 대응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박실의 장졸 180여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7월 1일. 도주 도도웅와는 이종무 장군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항복을 했다. 비로소 대마도는 조선원정군의 의해 완전하게 소탕 정벌되었다. 도주의 항복을 받은 이종무 장군은 병사와 선단을 이끌고 거제도로 개선하니 출정 14일 만인 그날이 7월 3일이다.

⦁상왕 이방원은 왜구의 소굴 대마도를 정벌하고 난 다음 병조판서 조말생을 불러 대마도가 조선의 땅임을 분명히 하는 서찰을 적어 대마도 도주에게 전했다. “대마도는 경상도의 계림에 속해 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은 문적에 실려 있음을 상고해 볼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쓰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중략) 대마도 수호 도도웅와는 그 자신自新할 길을 열어 멸망의 화를 면하게 하고 나의 생민을 사랑하는 뜻에 맞도록 하라.”

일본인들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생떼를 쓸 때마다 600여 년 전에 기록된《태종실록》을 읽어주며 대마도가 분명하게 우리 땅임을 깨우쳐 주고 싶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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