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서)임진란이 일어난 초기에, 전 의주목사(義州牧使) 권율(權慄)이 자기 집에서 한가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임금이 그의 재주가
⌜지난 호까지는 약 60여회에 걸쳐서, 라는 대 주제 하에, 진주읍성(晉州邑城)의 형성과정, 진주성 전투의 역사적 의미와 진주의병(晉州義兵)의 활동상황 그리고 이어서 촉석루의 창건 및 중건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본 호부터는 진주성과 논개(論介)의 순국(殉國)에 대해서 고찰해보기로 한다.⌟우선 논개의 순국(殉國)사연의 전개과정을 살펴본다면, 그의 거룩한 분노와 숭고한 죽음으로 국난을 극복한 의열여인(義烈女人) 논개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광해군 13년(1621년)으로 논개 사후 28년 후인 류몽인(柳夢寅)
< 소제 > ⌜지난 호에 이어서 본 호에서도 1950년대 촉석루 중건 시 필요했던 건설재료 및 여타 재료에 대한 도입과정과 그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1956년 당시 촉석루 중건에 필요했던 적합한 대들보를 구하기 위해, 그 당시 민선인 김용주 진주 시장과 진주시교육위원회 강용성 교육감은 대들보 나무가 있는 인근 육군 제3군단 오덕준 장군을 찾아가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임을 알리고 공병 1개 대대를 동원시켰다. 대들보 중 큰 것은 272년 생 전나무였다. 베어 낸 자리에 인부 12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김용주 시장은
1946년 당시에 진주시 교육위원회 서무계장으로 계셨던 이계장님의 증언에 의하면 1954년에 촉석루 중건을 위한 ‘중건기성회’가 구성되면서 본격적인 추진이 되었지만 예산문제로 큰 성과는 보지 못했음도 증언하기도 했다. 강원도 오대산에서 당시 육군 제3군단 오덕준(吳德俊 : 김해출신) 장군의 증언은 당시 약 22m(양쪽 여유분 포함)정도의 대들보 등을 산에서 베어 끌어 내리는데 공병 1개 대대가 1년 정도 걸렸다고 했다.당시로서는 이 대통령의 지시라면 어떤 일도 거의 가능할 수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3군단 공병대대는 대들보 등을
1956년 문교부(오늘 날 교육부) 문화재 보존과장 이었던 최낙구씨라는 분은 고향의 촉석루가 6.25 때 불탄 후 중건을 못해 늘 애석하게 여겨오던 중 그 해 문화재 관련 예산을 편성하다 남은 예산 400만환을 억지로 촉석루 재건비로 편성했다. 당시 400만환은 촉석루 기둥하나 값도 안 되지만 중건추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예산 항목을 만들었다는데 큰 역할을 했고, 추진의 첫 시동을 걸게 되었다.최낙구씨는 촉석루 재건의 타당성으로 단순한 건축 공사가 아닌 논개의 순국 얼과 진주성의 호국정신을 되새기고 배일(排日)교육의 일환임을 내세
우선 조선시대의 촉석루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면, 1390년대부터 조선 왕조가 개국했지만 조선 초기에는 촉석루는 중건되지 않고 진주객사 앞에 있었던 봉명루(鳳鳴樓)를 개수, 촉석루를 대신하여 각종 행사장으로 사용했다. 그 당시의 기록도 봉명루가 대표누각으로 나오고 있다. 촉석루가 불에 탄 34년이란 오랜 기간 황폐화가 된 채 방치돼 오다 태종 13년인 1413년에 중건됐음을 하륜의 촉석루 기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기문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하륜이 영의정(領議政)을 지냈기 때문에 촉석루 중건에 많은 지원과 영향력을 보였다. 기문의 중건
촉석루의 창건연대는 교남지(嶠南誌) 53권 14장 진주관안(晉州官案)조에 촉석루 창건자는 김준(金晙: 1057∼1124)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김준은 진주시가 촉석루의 공식창건자로 기록한 김지대보다 약 100여 년 앞선 인물이라 누가 창건 했는지를 알 수 없지만, 이미 촉석루라는 이름은 그 당시부터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교남지에 김준은 장원급제를 하고 진주사록(司祿)으로서 청백리에 뽑혔으며 진주 촉석루를 창건했다고 되어 있다. 진주시가 촉석루 창건자로 “고려조 고종 28년(1241년) 진주목사 김지대(1190∼1266)”로 못
촉석루 일대 누각⦗진양지(晉陽誌), 승람(勝覽), 진주목읍지(晉州牧邑誌), 하수일(河受一)의 등에도⦘은 함옥헌(涵玉軒), 청심헌(淸心軒), 관수헌(觀水軒), 쌍청당(雙淸堂) 등 4개가 있었다. 전국 3대 누각의 하나인 촉석루도 밀양의 영남루처럼 보조 누각이 여러 개 있었다. 영남루는 촉석루보다 1칸이 적다. 촉석루같이 커다란 이층 누각으로 동쪽에는 침류각(枕流閣)을, 서쪽에는 능파각(凌波閣 )을 부속 누각으로 거느리고 있다.촉석루와 헌(軒) 사이는 돌다리로 이어져 있었으며, 조선 숙종 때 진주성도(晉州城圖)에도 청심헌
⟪진양지(晉陽誌)⟫ 등 여러 문헌들을 보면, 촉석루는 당초 가파른 벼랑인 일명 용두산(龍頭山 : 풍수상 용머리 또는 위치로 볼 때는 돗대)인 현재 임진대첩계사순의단(壬辰大捷癸巳殉義壇) 자리에 있었던 용두사(龍頭寺)의 부속 건물로 처음에는 간소한 초당(草堂)으로 창건되었음을 추정 할 수 있다. 하륜의 촉석루 기문에 용두사는 읍(邑)이 설치될 때 함께 창건된 것이 ⦗진양지 : 향지부로의일(鄕之父老議日) 용두사초읍지소龍頭寺初邑置所)⦘다. 촉석루는 지역 노인들에 따르면 지방이 처음 생길 때부터 있었고, 지방의 빼어난 경치이나 오랜 기간 황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66호인 진주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전국의 명승(名勝)이다. 진주성 남쪽 절벽 위에 우람하게 자리하고, 진주 남강이 긴 세월 그 허리를 감돌고 있어, 웅장(雄壯)하고 수려(秀麗)한 그 위풍(威風)은 진주 천년의 기상(氣像)을 대변하고 있다. 동시에 계사년(1593년)에 순국한 진주인 7만 민⦁관⦁군의 의혼(義魂)이 잠든 곳이기도 하다.촉석루(矗石樓)의 촉(矗)자는 곧을 직(直)자가 3개가 모인 글자로, 그 의미는 ‘높고 뾰쪽하다’는 뜻이며, 남강 변에 직각의 절벽위에 세워졌다고 해서 ‘촉석루’로 명
「지난 호에서는 의병(義兵)의 정의(定義)에 이어 임란기간 내내 관군의 무기력함 에 따른 초기 전국적인 의병상황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과 정사(正使)인 황윤길 그리고 재상(宰相) 류성룡(柳成龍)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본 호에서는, 당시로써는 가장 활발했던 경상도와 진주지역의 의병운동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사실상 진주를 중심으로 임란 의병운동이 매우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당시 진주목(晉州牧) 관내에서의 의병봉기 및 활동에 관한 자료가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하여 향후 관련 전문학자나 지역의
원래 의병이란,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아무런 연고(緣故)도 없는 백성들이 외부의 침략에 대항하여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나 그 군대소속의 병사를 의미하는 것이다.특히 본 고에서는 1500년도 말경의 진주지역의 의병과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임진왜란 초기 관군(官軍)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국토가 왜군에게 짓밟히고 있을 때, 사방에서 동족을 구하고 향토를 수호하자는 자발적인 부대가 나타나 향토방위에 나섰다. 이 자발적인 무장부대들은 나라에 대한 충의를 내세우고 봉기했던 사람들을 의병(義兵)이라고 부른다. 의병
본 호에서는 특별히 진주의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행장(行狀)과 그의 애국충절 활동에 대해서 기술해 보기로 한다.⌟논개는 1574년(선조7년) 9월 주달문(朱達文)과 박씨 사이에 딸로서 전북 장수현(長水縣) 계내면(谿內面) 주촌리(朱村里)에서 태어났다. 주달문은 진사의 신분으로 그의 어린 딸에게 일찍부터 글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총명하여 시문에도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논개가 7살이었을 때 사망하였다. 논개는 가세가 기울자 그의 숙부 댁에서 성장하였으나 혼사로 인한 송사(訟事)에 관련되어 고초를 겪게 되었
진주정신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진주의 정체성 정립의 인문학 자료서인 《진주향토인문학》 자료집이 강신웅(본지 논설위원)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의 편저서로 출간되었다.진주와 관련한 기존의 뚜렷한 사실(史實)에 근거한 전대(前代)의 기록과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편집한 일종의 진주역사 참고서이다.이번 『진주향토인문학晉州鄕土人文學』이라는 편저서는 강신웅 교수가 대학교직에서 퇴직한 2010년부터 ‘진주문화원’과 그리고 2015년부터 본인이 주관하여 설립한 ‘진주향토인문학 아카
우리나라의 기녀제도(妓女制度)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시대의 유녀(遊女)에서 비롯되어, 관료체제가 전국적으로 제대로 갖추어지면서 부터 관기(官妓)도 공식적으로 전국 관아에 배치됨에 따라 기녀제도가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교방(敎坊)은 관아에 소속된 기생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그런 와중에, 진주 기생의 충절, 미모, 예기(藝妓)는 일찍부터 조선에서 최고 수준이었음이 공인되어 왔다. 그리고 ‘남 진주, 북 평양’이란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진주 기생은 그 당시에나, 지금까지도 거의 전설로 남아있
그 다음날인 6월27일 적이 동⦁서 양쪽 성문 밖 다섯 곳에다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대쪽을 연결하여 방책을 만들어 성중을 굽어보면서 끊임없이 총탄을 발사하여 아군 전사자가 300명이나 되었다. 또한 왜적은 대궤(大櫃)로 사륜차를 만들어 그 위에 적병 수십 명을 싣고 각자가 철갑을 쓰고 궤(櫃)를 밀어서 성벽 아래까지 침입하여 철주(鐵柱)로 성벽에 돌입할 구멍을 뚫었다. 왜군은 외부에서의 공격만으로는 성을 함락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왜군은 성(城)의 지하를 굴착하여 성벽을 붕괴시켜 함락코자 했던 것이다.
* 제2차 진주성 전투의 함성(陷城) 개황(槪況)(1) 진주성 제2차 전투는 1592년(임진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에 걸쳐 왜장 장곡천수일(長谷川秀一), 장강충흥(長岡忠興), 목촌중자(木村重子) 등 2만여 병력으로 제1차로 총공세를 폈다가 실패 한 곳에서, 이듬해 또 다시 벌인 전투였다. 왜적이 집요하게 진주성을 공략하고자 한 요인(要因)은 전년(1592)도 패배에 대한 보복과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통하는 활로(活路)를 트기 위함도 포함돼 있었다.이듬해인
한약(韓藥)은 당귀수산 등 어혈(瘀血)을 제거하는 처방이나 오적산(五積散)과 같이 노폐물(老廢物)을 제거하여 근막(筋膜)의 상태를 정상화하여 통증을 없애는 처방을 보통 사용하게 되는데,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한방 처방을 받아 한약을 복용한 82.0%의 환자는 도움이 되었다고 응답하였으며, 17.5%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응답하였다. 이들 중 75%는 교통사고 치료 이외의 목적으로도 한약 치료를 받을 의향이 있다고 대답하여, 한약 치료에 대한 만족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출처: 급성기 교통사고 상해 환자
첫 번째 비화는 1차 진주성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김시민(金時敏) 목사에 관한 내용으로, 진주성 전투의 현장에서 그는 적탄이 비 오듯 쏟아져도 그 어떤 두려움이나 위축감도 없이 장졸들을 타이르기를 “온 나라가 적에게 짓밟히고 남아 있는 곳은 오직 진주뿐이다. 이곳 진주성만이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진주성이 무너지면 나라 전체의 존치(存置)가 매우 어렵다. 한번 패하면 진주성안의 수 천 명의 생명이 모두 적의 칼과 창의 밥이 되지 않겠는가! 진주성 장졸들이여! 혼신의 전력을 다하여 분전하고 죽을 땅에서 뒤를
경남경찰청 아동학대 특별수사팀은 몽골 국적 여중생 집단폭행 가해 학생 4명에 대해 재수사를 벌여 검찰에 추가 송치했다고 9일 밝혔다.이번에 경찰이 추가한 혐의는 공동강요, 중감금, 성 착취물 제작(배포), 모욕, 강제추행, 보복 협박 등 총 6개다.경찰에 따르면 작년 7월 3일 자정께 양산시 모처에서 외국 국적 여중생이 또래 4명으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했다.당시 경찰은 공동폭행 혐의만 적용해 이들을 울산지검에 송치, 법원으로부터 단기 소년원 처분을 받았다.그러나 피해자 측에서 재수사를 요구하고 국가수사본부도 사건을 다시 들여다볼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