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權慄)(1)

<본 고는 대구자수박물관 정재환관장이 30여 년 전에 백병풍(白屛風)에서 발굴, 소장해온 국내의 희귀 고문헌자료로서, 조선조 인조2년(1624) 일본에 수신사(修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계영(辛啓榮 1577∼1669)이 그 어떤 정사(正史)에서도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당대의 신빙성 있는 고사(故事)를 한자(漢子)원문으로 기록된 자료를 본인이 국역(國譯)한 역사자료이다.>

 

(지난 호에 이어서)

임진란이 일어난 초기에, 전 의주목사(義州牧使) 권율(權慄)이 자기 집에서 한가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임금이 그의 재주가 사정에 따라 등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기용하여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제수하였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이 남쪽 지방을 죽을 곳으로 보고 있었는데, 공은 명을 받들어 한 대의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갔다. 광주에 이르렀을 때 도성은 이미 지켜지지 못하여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거동하였다. 병사를 징집하여 들어가 호위하며 순찰을 하고 있었는데, 이광(李洸)이 4만 명의 군대를 출동시켜 방어사(防禦使)와 함께 나누어 거느리고는 북쪽으로 가서 공을 임명하였다. 방어군의 중위장(中衛將)이 직산(稷山)에 이르러 충청도의 병사와 만났는데, 또한 수만 명이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였다. 이광은 먼저 용인(龍仁)에 있는 적을 치려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적이 먼저 요해처를 차지하였으니 습격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보다 큰 곳인 도성도 이미 적들이 차지하였는데 주공(主公)이 한 도(道) 전체의 대중들을 모두 동원하여 와야만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위쪽으로 조강(祖江 :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합류되는 지점으로부터 월곶면(月串面) 북부 지역을 흐르는 강)을 건너 임진강(臨津江)을 막아서 적들이 서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서 행재소에 보고를 올리면 큰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작은 곳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은 만전을 기하는 계책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선봉장 백언광(白彦光), 조전장(助戰將), 이지시(李之詩)가 각자 정예병 일천 명을 거느리고 재빨리 진격할 뜻을 갖고 있었는데, 공이 또 만류하며 모두 따르지 않았다. 백언광 등이 이르자 모두 죽었다.

이날 밤 군중에서는 괜히 놀라는 일이 있었는데, 아침이 되어 적들을 바라보니 크게 무너져 있었고, 여러 군졸들이 모두 본도(本道)로 돌아왔다. 공도 역시 자기 치소(治所)로 돌아왔는데, 자면서도 옷을 벗지 않고 주장(主將)의 명령을 대기하였다. 한참이 지나 조용해지자 공이 즉시 분연히 말하기를

“지금은 신하로서 나라가 망하는 날을 기다릴 때가 아니다.”

라하고 마침내 경내의 자제들 5백여 명을 모으고,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달하여 천여 명을 얻었다. 또 순찰사가 공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임명하였다. 공은 여러 고을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이치(梨峙)의 요해처에서 적을 막아 영남에서 호남으로 오는 적을 차단하였다. 7월에 적이 과연 이치로 쳐들어와서 재빨리 울타리를 뛰어넘어 들어왔다. 공이 칼을 빼어 들고 크게 외치며 앞장서서 칼날을 무릅쓰고 나아가니, 병사들이 모두 일당백(一當百)의 역할을 하였다. 적들은 죽고 다친 사람을 구제하기에도 힘이 부쳐 군수물자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고 난 후 행재소(行在所)에서 공을 의주목사에서 파면한다는 공문이 날아왔는데, 얼마 후에는 또 본도의 순찰사로 승진되었다. 임금의 교서가 진중에 이르자, 공은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매우 비통하게 눈물을 흘렸다. 일군(一軍)을 움직여 즉시 방어사에게 명하여 이치를 대신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전주(全州)로 가서 도내의 병사 만여 명을 출동시켜 9월에 근왕(勤王)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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