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박사 조문주
초등교육코칭연구소장
시인

나는 엄마의 따뜻한 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란 입양아였다. 아이를 낳지 못해 나를 입양하여 시골에서 할머니랑 양반집 손녀로 살게 한 엄마는, 도시에 살면서 가끔 다녀가셨다. 그때마다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기는커녕 혼을 내거나 핀잔을 주며 이유 없이 자존감을 짓밟곤 했다. 그래서 엄마라는 존재는 늘 두렵고 무섭기만 했고 내게는 강적이었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백일만에 집을 나와 공장을 다니며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다녔다. 나는 보란 듯이 잘 살아야했다. 졸린 눈을 퉁겨가며 공부를 하고 또 했다. 교육대학교에 합격한 후에 엄마라고 찾아갔다. 머리채를 끌리며 문전박대를 당했다. 엄마는 행여 자기에게 학비를 보태 달라 할까봐 겁이 났나보다. 아르바이트도 해 가며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식 때도 나타나지 않았고 큰아이 첫 돌 때도 온다고 해놓고는 안 와서 시댁 보기가 참으로 민망 했다. 엄마는 돈이 있는 사촌에게는 대우를 잘 해주고 가난한 우리 부부는 공개적으로 무시했다.
‘원망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그래서 나는 부자가 되어야만 했다. 엄마보다 더 똑똑하게 잘 살고 싶었다. 남편의 사업을 도와 돈을 벌기 시작했고 자식 교육 잘 시킨 덕도 톡톡히 보게 되었다.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고, 전원주택에서 행복하게 잘 살게 되었다.
“선생님, 잘 사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비결? 내 마음을 잘 챙기며 산 거 뿐인데...”
돌아보니 강적 엄마 때문이었다.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사람, 힘들게 한 사람, 많이 울게 했던 그 엄마가 강적이었다. 이분 때문에 나는 열심히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잘 살게 되니 전화 받는 목소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야, 우리 따알~~”
하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엄마가 필요할 때는 가난하다고 무시하더니 내가 살만하니 아는 체를 한다. 통화를 하고 나면 기분이 나빠져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가 어려웠다.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부르며 글을 쓰는 시간들을 가지게 된다. 애정결핍 증세가 있나 싶어 마음공부를 엄청하다 보니 코칭 전문가도 될 수 있었다.
남들은 지금 잘 사는 나를 보고 그늘 없는 행복한 사람으로 본다. 강적인 엄마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으리라. 아마 나태하게 대충 살았을 것이다. 여든 노인이 된 강적 엄마가 고마워진다.
살아오면서 나를 시기하고 음해했던 사람들, 미워하고 원망했던 사람들, 애를 먹인 아이들, 나의 강적들이다. 강적들을 원망하기보다 감사하며 마음공부하며 열심히 살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 은혜가 참 고맙게 여겨진다. 지난날 강적이었던 분들이 지금은 고마운 사람으로 쑤욱 다가온다. 강적인 당신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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