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사 나들이-34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침입한 왜군들 가운데에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아가지 않거나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 남은 자들이 적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록 김씨(友鹿金氏)의 시조 김충선(金忠善)과 함박 김씨(咸博金氏)의 시조 김성인(金誠仁)은 왜군 장수였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의 문물에 감화되어 귀화한 후 오히려 왜군을 물리치는 데 앞장서 선조로부터 성을 하사받고 조선에 뿌리를 내렸다.

김향의(金向義), 김귀순(金歸順), 이귀명(李歸明) 같은 인물들도 모두 귀화 왜군으로 관직까지 얻었다.

귀화 왜군들의 이름 대부분이 충성스럽고 선하다’, ‘의로 향하였다’, ‘순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한편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귀화 왜인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대개가 항복한 왜군들이어서 흔히 항왜’(降倭)로 불렸다.

이들 가운데에는 조선군에 소속되어 왜군을 상대로 선무 공작을 벌이는 등 조선을 위해 봉사한 인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이시언(李時言) 휘하의 항왜 기오질기(其吾叱己)와 사이소(沙已所)는 경남 거창에서 왜군 17명을 유인해 오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조선에 남은 항왜는 귀화인이라는 의미의 향화인(向化人)으로 불렸다.

그들 중 화약 제조 기술 같은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은 관청에 소속되어 염초(焰焇: 화약의 원료)를 굽는 등의 활동을 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왜인들은 자기들끼리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특히 해변 고을에 많이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일본의 풍속을 그대로 지키며 독자적으로 생활하였다.

조정에서도 이들을 조선에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별반 기울이지 않고 그저 예조에 소속시켜 아전들로 하여금 세금만 거두게 할 뿐이었다.

명령에 따라 전장으로 끌려 나왔다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을 그리워하며 살아갔을 이들 향화인들도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전쟁의 희생자들이었다.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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