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또 그해 마지막 달, 그 순간이 왔네. 해마다 그랬듯이 해가 질 무렵이 되니 끝을 못 본이와 끝을 본 이가 마주보고 말한다.
“얼마나 했냐고, 어떤 좋은 일이 있었더냐?”고.
“수지가 맞은 해였냐?”고. 한마디로 올 해는 번창과 안녕이 어우러져
“의미 있는 한해가 되었냐?”는 물음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대답은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 하루살이나 잠자리가 새들이 공격해 올 줄 알면서 하늘을 날고 있다. 뿐만 아니라 푸른 하늘의 흰 구름도 곧 사라져 없어질 순간까지 바람을 기다리고 있다. 떠밀려 비가 되 든, 눈이 되 든. 자신의 운명을 바람에게 맡긴다.
  봄에 보았던 벌 나비가, 여름에 울었던 매미나 곤충이, 가을에 잡았던 메뚜기가 어디가고 없는데 무엇을 기대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인간이기에, 그래도 산 날이 길기에 남긴 것이 있어야 하지 아닐까 해서들 묻는 말일 것이고 느낀 보람일 것이다. 생각하니 니글니글한 속을 달래려고 탄산음료 캔을 뚝 따서 단 숨에 콜콜 들이마시고는 깡통을 두 손가락으로 힘껏 찌그러트려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자신이 생각해도 별로 남은 것이 없는가보다. 시끄런 머리나 꽉 막힌 가슴을 틔우려 등산화 끈을 동여매고는 야트막한 산을 오른다. 제가 뭐나 되는 듯, 수천 수 만년을 비바람에 날리고 흩어져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산을 줄기부터 정상까지 밟고 당돌하게 올라서서 내려다본다. 내린 살 얇은 거죽에 발붙이고 피고 선 풀과 나무. 그 생명력에 감탄한다.

  작은 찻집에 앉아 곱씹어 보지만, 봄부터 피었던 개나리부터 가을 늦게까지 핀 들국화까지. 금년의 2/3를 코로나19의 난장판에서 혼비백산한 꿈들. 흙모래의 아이스크림이 되고 말았다. 앞에 놓인 뜨거운 커피 잔에게는 미안한 맘이다. 일만 많았지 수확한 결실은 너무 빈약하다. 하늘에서 날려 온 두 차례의 설탕가루 물에 타 마셔 본들 갈증은 멈추지 않고 낮은 신용등급에 도리 없이 빚 위에 빚을 내어 산다. 모두가 빈 웃음의 얼굴들이다. 수 억 년을 떠 있는 해와 달에게도 미안할 따름이다. 진정한 즐거움을 갈망하고 따뜻한 마음이 고픈 한 해였다. 그런 줄 알면서 주야로 들고 나는 바닷물이 돋보인다. 파도를 앞세운 걸음에 온갖 쓰레기까지 걸머지고도 말없는 걸음걸음. 갈매기의 위로에 더욱 힘을 얻어 바위를 때리며 철썩거린다.
“파도야! 그 걸음도 빈 걸음이더냐?”

  올 해는 세계도 나라도 사회도 가정도 모두 나락(那落)이다. 그렇지만 남은 날을 비워서야 되겠는가. 남은 해의 눈을 감겨서야 되겠는가. 새로운 햇살이 비칠 때 연두색 젊은 꿈을 다시 피워 보자. 새 봄, 꽃 피고 아지랑이 웃을 때 같이 웃고 뛰어보자. 또 신선한 사랑이 부를 때를 기다리며.
                                        *나락 :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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