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癸巳年1593) 7월, 논개의 처절한 순국(殉國)은 위대하지만, 논개의 신분과 행장(行狀)에 관한 정확한 사실(史實)이 아직도 정립되지 않고 있다. 오직 서책형식의 두 자료인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초사담헌(草榭談獻)⟫이 있기는 하나, 그 두 자료는 정통성과 객관성이 부족하고, 내용조차 매우 산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니, 430여년의 긴 세월동안, 여전히 논개의 그 거룩한 애국충절의 역사적 진실이 아직도 분명히 밝혀지지도 않고, 심지어 와전(訛傳)되고 있음에 매우 한탄스러울 뿐이다.

촉석루에 오르기 전에 먼저 촉석루 서쪽에 있는 의기사(義妓祠)로 들어가는 조그만 쪽문을 향한다. 문 위에는 지수문(指水門)이라는 현판이 소박하게 붙어있다. 지수문이라는 명칭은 이른바 三壯士 詩라고 알려진 시의 둘째 구에 한 잔 술에 웃으며 장강 물을 가리키네(一杯笑指長江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지수문을 들어서면 논개(論介)의 영정을 모셔 놓은 의기사가 있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유몽인(柳夢寅15591623)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 나타난다. 癸巳之歲, 金千鎰倡義使入, 據晉州以抗倭, 及陷城, 軍敗人民俱死而, 官妓論介, 凝粧靚服, 立於矗石樓下, 峭嵓之前, 其下萬丈直入波心, 群倭見而悅之皆莫敢近, 獨一倭挺然直進, 論介笑而迎之, 倭將誘而引之論介, 遂抱持其腰直投于潭俱死.

<계사년(1593)에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로 들어와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웠으나,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군대가 패하자 백성들도 모두 죽게되었다. 이때 관기 논개는 화장을 짙게하고 옷도 곱게 차려입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앞에 섰다. 그 아래는 만길이나 깊어 보이는 물속으로 곧장 빠져 들어갈 것만 같았다. 여러 왜적이 그 녀를 보고 좋아했으나, 누구도 감히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이 때 한 왜적이 뛰쳐나와 곧장 달려들었다. 그러자 논개는 웃으면서 맞이하여 그 왜장을 유혹하여 끌어들여, 논개는 마침내 그의 허리를 껴안고 바로 강물에 몸을 던져 함께 죽기에 이르렀다.>

상기의 於于野談에는 논개가 단지 관기(官妓)라는 것 외에 그에 대한 인적 사항에 대한 다른 정보는 없다. 그리고 또 다른 그 어떤 자료에도 이 이상의 자세한 정보나 믿을 만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성해응(成海應 17601839)초사담헌(草榭談獻)논개는 장수의 기생이었는데 최경회의 첩이 되었으며, 1593년에 최경회가 경상우병사가 되었을 때 진주로 함께 들어왔다.”라는 기록이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논개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상은 후대인들이 만든 일종의 스토리텔링 정도로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다만 상기 두 자료의 내용에 따라 논개에 대한 행장(行狀)과 인적사항을 대강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논개는 그의 이름이고, 성은 주씨(朱氏)로 알려져 있다. 전라도 장수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숙부에게 의탁했는데, 숙부가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고는 논개를 이웃 사람에게 민며느리로 팔아넘겼다. 이 사실을 알고 논개 모녀는 피신을 하였으나 이웃 사람의 제소로 관아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 때 현감이 바로 최경회(崔慶會)였다. 최경회는 모녀를 방면하고, 그들을 거두어 주었다. 그리고 후에 최경회는 그를 첩으로 맞아들였다.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었고, 이듬해 4월에 경상우도병마사가 되어 진주로 가게 되었다. 2차 진주성 전투 때 논개는 최경회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주성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으며, 그 후의 논개의 인적사항은 於于野談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이 전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도 실제로는 그 출처가 모호(模糊)한 부분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의기사(義妓祠)1740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건립한 것으로 소개된 곳도 있으나, 그 근거도 제대로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남덕하는 1740년에 논개의 정려각(旌閭閣)을 건립했고, 의기사는 그보다 늦게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780년 즈음에 경상우병사 홍화보(洪和輔)가 일부를 보수하고 새로 단청을 하였으며, 1823년에 목사 홍백순(洪百淳)이 중건하였다. 그 후 한국 전쟁 때 촉석루가 폭격을 맞아 타버렸지만 의기사는 온전하였는데, 1956년에 진주의기창렬회에서 중건하고 새로 초상화를 안치하였다. 그 초상화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그린 것인데, 고증 결과 복식과 머리 모양 등이 당대와 맞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논개 영정을 공모한 결과 석천 윤여한 교수의 작품이 선정되어 2008년에 교체되었다. 하여, 의기 논개의 거룩한 충절정신을 보다 진정성 있게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록이 상기의 의기사 건립과정과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의기사를 두고 지은 기문의 내용이다. 그 기문의 원문과 내용은 다음 호에 기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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