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전후(壬亂前後) 조선(朝鮮) 비록(秘錄)

논설위원 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논설위원(인문학)
논설위원 강신웅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논설위원(인문학)

 

<본 고는 대구자수박물관 정재환관장이 30여 년 전에 백병풍(白屛風)에서 발굴, 소장해온 희귀 고문헌자료로서, 조선조 인조2년(1624) 일본에 수신사(修信使)의 종사관(從事官, 현 자유투고가)으로 다녀온 신계영(辛啓榮 1577∼1669)이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당대의 신빙성 있는 고사(故事)를 기록한 일종의 역사자료이다.>

 

임란 때의 응전과 피난(1)

만력(萬曆) 신묘년(1591년)에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정권을 차지하고 악행이 무르익었다. 스스로 군대가 강하다고 믿고 중원(中原)을 침범하고자 하여 우리 조선에 편지를 보내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 편지에 “한 번 뛰어서 곧장 명나라로 들어가겠다.”라고 하였다. 선조 임금이 그 사신 평의지(平義智) 등 을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고, 우리나라는 명나라를 이백 년 동안 신하로서 섬기고 있으니, 요청을 따르기 어렵다는 뜻으로 차근차근 설명하고, 고사를 인용하여 증거를 대면서, 의리에 근거하여 승냥이처럼 탐욕스런 마음을 꺾어서 보내 주었다.

임진년(1592년) 4월이 되어 적들은 마침내 나라를 텅 비우고 전 병력을 동원하여 쳐들어왔는데, 대략 25,6만이나 되었다. 바다를 뒤덮고 도착하여 정박을 하니,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조복(朝服)을 단정히 착용하고 평상에 걸터앉아, 기쁜 마음으로 절개를 지키다가 죽었다.

대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처럼 쳐들어왔다. 조정에서는 이일(李鎰)에게 명하여 훈련도 전혀 받지 않은 약간의 병사를 거느리고 영외(嶺外 : 서울의 변두리)에서 막게 하였다. 신립(申砬)은 요청도 없었는데 스스로 갔다. 신립이 일찍이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었는데, 당시 국경의 오랑캐 니탕개(尼湯介 : 조선 때 여진족의 추장)가 변란을 일으켜 도적질을 하였는데 , 신립이 철기(鐵騎)를 타고 급습하여 크게 무찔러, 위세와 명성을 크게 떨쳤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때 사람들이 모두 ‘비장군이라면 적진에 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신립도 비장군으로 자임하던 터라 싸우고 싶어 하니, 임금이 탄식하면서 허락하였다. 지역민 3천 명을 뽑고, 가는 길에 또 천여 명을 얻어서 갔는데, 조령(鳥嶺)에 이르러 산 중턱에서 이일(李鎰)이 약간의 패장병 들을 이끌고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신립이 이르기를 “전쟁에 패한 군대의 장수는 처벌하는 법이 있다.”라하고, 그 자리에서 효수(梟首)하라고 명하였다. 이일이 크게 소리치며 “ 장차 공을 세워 죗값을 치루는 것은 군법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장군께서 바야흐로 적을 쳐부수고 큰 공을 세우고자 하면서, 먼저 장사를 죽이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립이 적병이 지금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묻자, 지금 문경을 지났다고 하였다. 이에 신립이 “이미 넓고 평평하여 내달릴 수 있는 곳을 지났으니, 이제 달천(達川)으로 퇴진하려 한다. 네가 선봉이 되어 길을 안내하겠느냐?”라고 하니 “오직 장군의 명령대로 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병사를 돌려 제독(提督)을 본받아 배수진을 치니 적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다음 호에서는 본문 ‘以輕騎二千倍道先發’부터 기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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