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대아고 출신 30년간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지휘
친형 하재준, 하성준 진주에서 두성기계공업주식회사 경영
싸이 등 유명 음악인들 산실인 美 버클리 대학 한국인 1호

고향 진주에서 세계적인 음악축제 개최하고 싶어
평생 소원인 종합예술대학교 베트남 하노이 시에 설립해
2000년 2400회 연주회 최다 개최 기록 기네스 북에 등재돼

세계에서 연주회를 가장 많이 개최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지휘자. 진주출신 하성호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이다. 하 지휘자는 1988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그가 공부했던 美보스톤 시의 보스톤 팝스오케스트라를 벤치마킹해 서울팝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그러나 장르파괴와 융합이라는 세계적인 음악조류를 잘 모르고 있었던 국내 음악계에서는 팝스란 이름이 들어간 오케스트라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하 지휘자를 클래식 음악계의 이단이라며 비난을 퍼 붙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심지어 하 지휘자를 마귀라며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견뎌냈다. 지금은 대부분이 서울팝스를 따라한다. 그가 음악계에서 장르파괴와 융합을 시도한 것은 이만이 아니다. 1991년 양악과 국악의 만남을 처음 시도했고 성악가 박인수와 가수 김종찬을 출연시켜 가요와 성악의 만남도 그가 처음 만든 것이다. 지금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러한 음악계의 만남이 그러나 당시로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당연히 음악계의 반발과 비난을 샀다. 그러나 하 지휘자는 작은 체구를 당당히 세우고 이들 비난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리고는 결국은 그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하 지휘자는 올해 9월 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 온 종합예술대학의 꿈을 마침내 실현시켰다. 베트남 하노이 시의 중심에 4년 제 종합예술대학인 International College Of Arts를 설립해 오픈 한 것. 이 학교에서는 드라마, 음악, 댄스, 디자인 등 예술의 모든 장르를 가르친다. 모든 과정을 영어로 진행하는 국제학교로 하 지휘자는 여기를 졸업하면 예술적 소양은 물론 적어도 영어와 베트남어는 구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하 지휘자가 총장으로 직접 교육일선에 서서 그가 평생 쌓아온 음악에 대한 기량과 한국의 한류 등도 전수할 것이라고 한다. 현재 베트남의 예술발전 속도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게 하 지휘자의 자신감이다. ‘대박’이라는 표현을 학교운영에 쓰는 것은 조금 이상할지  모르지만 대박이 날 것 같다는 게 하 지휘자의 지금 직감이다.

하성호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는 평생 음악을 해 온 사람으로 고향 진주에 세계적인 음악축제를 만들어 보는 것이 마지막 꿈이라고 했다.
하성호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는 평생 음악을 해 온 사람으로 고향 진주에 세계적인 음악축제를 만들어 보는 것이 마지막 꿈이라고 했다. 사진=김시원기자

국제적인 종합 예술대학을 설립한 하 지휘자가 마지막으로 꾸고 있는 꿈은 그의 고향인 진주에서 세계적인 음악축제를 만드는 것이다. 하 지휘자는 그의 고향 진주가 유럽의 세계적인 음악도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와 매우 닮았다고 생각한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가 탄생한 도시이며 영화 사운드오브 뮤직의 배경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중앙에 중세고성인 잘츠성이 있고 중앙으로 잘츠강이 흐른다.  잘츠부르크에서는 매년 여름에 음악축제를 열어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진주도 마찬가지로 도시 중앙에 중세의 고성인 진주성이 있고 도시 중앙으로 남강이 흐른다. 이 아름다운 진주에서 가을에 진주성과 남강을 붉게 물들이는 유등축제가 열린다. 하 지휘자는 동양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 유등축제에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음악축제를 개최한다면 유럽의 잘츠부르크 음악축제 못지 않은 세계적인 음악축제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크로스오버축제로 세계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게 늘 새로운 도전을 해 온 하 지휘자의 예감이다.

평생을 기존의 관념을 깨는 도전으로 살아온 하 지휘자가 그의 고향 진주에 대한 꿈이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1952년 진양군 수곡면에서 출생해

-어디서 태어났나

△1952년 진양군 수곡면에서 태어났다. 당시 수곡에는 진양하씨 집성촌이 있었다. 그런데 저는 두 살 때 진주시 수정북동으로 이사와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살았다. 수정북동에 있었던 어린이 놀이터가 우리 집 마당이었다.

-부모님이 누구인가.

△아버님은 하병렬이고 큰형이 하재준, 작은형이 하성준이다. 아버님은 일본에 자주 왔다 갔다 하셨고 큰형과 작은형은 진주에서 두성기계공업주식회사를 운영했다. 큰 형인 하재준회장은 진주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오래 역임한 것으로 알고 있고 작은 형은 두성기계를 운영하다가 4년 전에 돌아가셨다. 지금은 두성기계는 폐업을 하고 청산했다. 집안형들이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줬다.

-학교는 어떻게 되나

△진주에서 봉래초등학교 대아중학교 대아고등학교를 나왔다.

-초등학교 친구로는 어떤 사람이 있나.

△기억나는 친구로는 박정규라고 봉래초등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이다. 초등학교 때 공부도 1등, 싸움도 1등이고 얼굴도 잘생긴 친구였다. 저는 대아고등학교를 갔는데 그 친구는 진주고등학교를 다녔고 조선대 의대에 진학했다. 그런데 일이 있어서 의사가 되지 못하고 지금 진주에서 식당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전에 진주에 갔을 때 그 친구가 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기도 했다. 모든 면에서 최고의 친구였는데 인생이 좀 아쉬운 점도 있다. 이번에 다시 진주에 가면 그 친구랑 소주라도 한잔 할 생각이다.

 

하성호 지휘자는 올해 9월 베트남 하노이 시에 4년제 대학교인 종합예술대학을 설립해 오픈했다.
하성호 지휘자는 올해 9월 베트남 하노이 시에 4년제 대학교인 종합예술대학을 설립해 오픈했다.

 

◇대아고등학교 4회 졸업 서정주 한의원 원장이 동기

-대아고등학교 동기로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

△제가 4회이다. 동기로는 진주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서정주 원장이 있다. 지금도 연락하는 친구이다.

-음악은 어떻게 해서 하게 됐나.

△대아고등학교 다닐 때 밴드부가 처음 생겼다. 그래서 공부는 하기 싫고 해서 밴드부에 들어 간 게 평생 음악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밴드부 하면서 얼마나 멋을 내고 다녔든지 진주여고학생들이 스토커 수준으로 따라다녔다. 그때부터 여자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 나이로 66살이지만 아직도 여자들에게는 인기가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여자복은 타고 난 것 같다.

-모교인 대아고등학교와는 자주 연락하고 있나.

△박종한 교장선생님이 살아계실 때는 선생님을 자주 만났다. 선생님이 저를 많이 아껴 주셨다. 그래서 자주 찾아뵙고 했다. 제가 졸업할 때 사실 대아고등학교에 인재가 없었다. 지금은 합참의장도 나오는 등 대아고등학교 출신들이 인재가 많지만 대아고등학교 1회부터 6회까지는 사실 인재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 제가 성공을 하고 대아고등학교 명성을 높여준다고 생각하셔서 선생님이 저를 대견하게 생각하셨다. 박 선생님은 늘 많이 사랑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돌아가시고 나니 선생님이 그립다.  

 

◇대아고 밴드부 활동한 게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 음대를 다녔는데 그때 미국 버클리 음대에 유학을 하게 됐다. 버클리 음대 출신들이 우리나라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집단인데 제가 버클리음대 1호이다. 버클리에 유학을 한 게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게 된 것이다.

-버클리 출신으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누가 있나.

△우리가 잘 아는 싸이도 버클리 출신이고 최성수도 버클리 출신이다. 최성수는 제가 추천서를 써 줘서 버클리에 가게 됐다.

-어떤 계기로 추천서를 써 주게 됐나.

△가수 양수경 남편인 변대윤이란 사람이 당시 최성수 로드매니저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작고하셨는데 변대윤 선생이 저하고 친했다. 그런데 저한테 최성수가 버클리 음대를 진학하고 싶은데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해서 써 주게 됐다.  

-한국에는 언제 왔나.

△88년에 귀국했다.

-귀국해서 바로 서울팝스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나.

△그게 조금 사연이 있다. 유학을 해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기세등등하게 귀국해 모교인 중앙대 음대교수에 응시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박사학위도 받고 모교인데도 중앙대 음대에 교수로 채용되지 못했다.

-왜 그리 됐나.

△제 생각을 말하자면 우리 학계의 풍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로는 음악에 박사학위가 드문 시기였다. 그런데 미국 버클리를 졸업했지 박사학위도 있다 보니 기존의 음대 교수들이 집단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중앙대 총장이 집안 아저씨인 하경근 교수였다. 그런데도 교수로 임용되지 못했다. 음대교수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저를 교수로 임용하면 모두 사표 쓰겠다고 하니 총장인 아저씨도 두손을 들고 말았다.

 

하성호 지휘자는 지난 1988년 서울팝스오케스트라를 창단한 이후 3300회의 연주회를 개최했다. 하 지휘자는 세계에서 가장 연주회를 많이 갖는 사람으로 인정돼 지난 2000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하성호 지휘자는 지난 1988년 서울팝스오케스트라를 창단한 이후 3300회의 연주회를 개최했다. 하 지휘자는 세계에서 가장 연주회를 많이 갖는 사람으로 인정돼 지난 2000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1988년 미국 유학에서 귀국 후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창단

-그래서 서울팝스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나.

△그렇다. 열 받아서 그럼 직접 내가 만들어서 하겠다고 생각하고 내가 유학한 미국 보스톤시의 보스톤 팝스 오케스트라를 벤치마킹해 서울팝스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1988년 5월에 창단했다.

-서울팝스 오케스트라 규모는 어느정도인가.

△단원이 약 80명정도 된다.

-오케스트라에 '팝스'라는 이름이 들어가 당시로는 논란이 많았을 것 같은데

△그렇다. 지금은 크로스오버 음악이 별 문제없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이단이라고 엄청 시비를 당했다. 심지어 마귀라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팝스 뿐 아니라 성악가와 가요 가수가 함께 무대에 서는 것도 제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89년 4월 공연에서 성악가 박인수와 가수 김종찬이 함께 무대에 섰다. 이뿐 아니라 국악과 양악의 만남도 91년도에 제가 처음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시도들을 제가 모두 처음 한 것들이다. 당시로는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다들 따라 한다.

-서울팝스 오케스트라는 연주회를 많이 하기로 유명한데 지금까지 몇회정도 연주회를 개최했나.

△내년이 창단 30주년인데 지금까지 약 3300회 정도 연주를 했다. 2000년에 전세계에서 가장 지휘를 많이 한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당시 2400회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이다. 그만큼 저는 연주회를 많이 했다.

 

◇지금까지 3300회 정도 오케스트라 연주회 열어...기네스북에 등재

-오케스트라는 어떻게 운영되나

△기본적으로 연주회 수입과 후원회 수입으로 운영된다.

-후원회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1996년부터 21년째 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후원회는 현재 40명의 회원이 있다. 모두 기업 오너이다. 후원회 회원이 되기는 상당히 까다로운 자격요건이 있다.

-어떤 자격요건인가.

△기본적으로 기업 오너여야 한다. 월급쟁이 사장은 아무리 잘나가도 회원이 될 수 없다. 또 기업 매출이 400억 원 이상은 되어야 한다. 후원회 회원들 매출을 모두 합쳐보니 12조 정도 되더라. 그만큼 적어도 기업이 탄탄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이런 기본적인 요건 외에 음악에 대한 이해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 등을 가진 사람만이 후원회 회원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 자랑 하는 사람은 회원이 될 수 없다. 나이를 보니 35세에서 74세까지 다양하더라. 회원은 전국에 걸쳐있고 일본에도 있다. 일본에 9개의 골프장을 운영하는 사람도 회원이다.

-후원회 회원이 되면 부담하는 회비가 많은가

△그렇지 않다. 일 년에 300만 원 정도 낸다. 물론 회장은 2000만원을 내고 간부들도 조금 더 내지만 기본적으로 큰 부담이 될 정도로 회비를 내지는 않는다. 또 아무리 부자라도 회비 외에 다른 돈은 받지 않는다.

-이 후원 회비로 오케스트라 운영비가 충당되나.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여기 저기 도움을 구하고 또 매년 연말에 송년 디너 음악회를 개최한다.

-디너 음악회는 무언가.

△1996년부터 21년째 매년 연말에 서울 하이야트 호텔에서 디너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보통 25만 원 짜리 800장 정도의 표를 판매를 한다. 저 혼자서 표를 파는데 지금까지 늘 매진됐다. 이런 음악회 등을 통해 자금을 모아서 오케스트라 단원들 월급에 충당한다. 올해는 지금부터 판매할 거다.

 

하성호 지휘자는 팝스오케스트라 창단으로 크로스오버 음악을 최초로 국내에 상륙시켰으며 국악과 양악의 만남, 성악가와 가요 가수의 만남 등 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하성호 지휘자는 팝스오케스트라 창단으로 크로스오버 음악을 최초로 국내에 상륙시켰으며 국악과 양악의 만남, 성악가와 가요 가수의 만남 등 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베트남에 종합예술대학 설립해 내년 초 수업 시작

-하 지휘자는 평생 예술학교를 설립하는 게 꿈이었는데

△그렇다. 32살 때 필라델피아에서 예술학교를 설립했었고 서울에 오서는 99년에 서울종합예술학교를 설립했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경영권이 넘어갔지만 학생이 6000명에 달할 정도로 잘 운영되고 있다. 그 이후 다니는 교회에서도 학교를 만들었었다.

-최근 베트남에 종합예술학교를 설립했다고 들었다.

△베트남 하노이 시에 4년제 정규대학과정인 International College Of Arts(국제 종합예술대학)를 지난 9월 22일 개교했다. 베트남 문화부 차관과 전 국무총리인 한덕수 총리가 와서 축사를 해 주셨다.

-어떻게 운영되나.

△학사과정인데 일 년에 3학기제로 운영된다. 드라마, 음악, 댄스, 디자인 등 모든 예술분야가 있다, 모든 강의는 영어로 진행되며 교수들도 모두 영어권 출신들이다. 수업료는 일년에 약 8000달러이다. 이번에 한국유학생을 뽑기 위해 한국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것 같은가.

△한국학생들에게 매력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왜 그런가.

△우선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 가는 것에 비해 학비가 저렴하다. 일 년에 학비가 8000달러이고 생활비까지 포함해도 일 년에 1만 달러 수준이다. 연간 1300만 원 정도로 국내 예술대학 학비 수준이다. 또 졸업하면 베트남어와 영어를 능통하게 된다. 이는 베트남 현지 취업에 굉장히 유리한 수준이다. 현지 베트남 한국기업에 취업할 경우 연봉이 6000만원 수준이다. 국내에 비해 낮지 않다. 저는 죄송하지만 국내 지방대학에 비해 경쟁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 수업이 진행되나.

△내년 1월말에 수업이 진행된다. 그래서 지금 지방에 있는 예술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하려고 하고 있다. 100명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 취업기회는 많나.

△현재 베트남에 한국기업이 약 5000개 있다. 향후 5년 내에 한국기업 수는 2만개에 이를 것으로 본다. 따라서 베트남 한국기업에 취업할 기회는 많다고 생각한다.

-향후 학교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노이 시에서 시작하지만 곧 호지민시에 분교를 낼 계획이다. 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에도 분교를 설치할 생각이다.

 

하성호 지휘자 사인. "서울팝오케스트라 지휘자 하성호"
하성호 지휘자 사인.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지휘자 하성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축제 벤치마킹해 고향 진주에 세계적인 음악축제 기획하고 싶어

-고향인 진주를 위해 할 일은 없나.

△기회가 되면 고향 진주를 세계적인 음악축제가 열리는 도시로 만들고 싶다.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나.

△진주는 유럽 음악의 중심인 오스트리아 도시 잘츠부르크와 비슷하다. 잘츠부르크는 모짜르트가 탄생한 곳으로 매년 여름에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 음악회를 보려고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든다. 잘츠부르크는 도시 중심에 중세시대 고성인 잘츠성이 있고 도시 중심으로 잘츠강이 흐른다. 진주와 비슷하다. 진주는 도시 중심에 임진왜란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진주성이 있고 도시 중심으로 남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잘츠부르크가 서구적인 아름다움이 있다면 진주는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이다. 결코 잘츠부르크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 진주는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의 스토리가 있고 유등과 비빔밥, 진주냉면 등 스토리가 풍부하다. 진주에서 음악축제를 개최한다면 충분히 세계적인 축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가 평생 쌓아올린 음악계의 인맥을 총동원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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