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오, 촉석루 바라보며 지난날 떠올려

학자 정이오 선생이 나이가 들어 귀향길에 올랐는데, 맑은 하늘을 보고 고비마다 힘들었던 지난 일들이 떠올리며 자신의 심경을 읊어보는 시를 작성하게 된다. 사진은 촉석루 전경.
학자 정이오 선생이 나이가 들어 귀향길에 올랐는데, 맑은 하늘을 보고 고비마다 힘들었던 지난 일들이 떠올리며 자신의 심경을 읊어보는 시를 작성하게 된다. 사진은 촉석루 전경.

▶지난호에 이어

 

그 다음 역시 촉석루 안에 걸려 있는 또 다른 시문을 보기로 한다. 상기 하연의 시와는 달리 매우 긴 7언시로서 서체는 비교적 알아보기 쉬운 해서체로 되어있다.

興廢相尋直待今 흥폐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르러

​層巓高閣半空臨 층층바위 절벽위에 높은 루가 하늘에 닿았네.

​山從野外連還斷 들 넘어 산줄기 끊어질 둣 이어 돌고

​江到樓前闊復深 누각 앞에 이른 강은 넓어지고 깊어지네.

白雪陽春仙妓唱 백설 양춘은 기생들이 즐겨 부르고​

光風霽月使君心 광풍제월은 군자의 심사로다,

當時古事無人識 그 때의 옛일을 뉘라서 알리오 만

​倦客歸來空獨吟 고달픈 객 돌아와 속절없이 읊조리네.

상기 시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의 세종16년까지 살아서 향년(享年)이 81세까지 이른 당시로써는 매우 장수했던 학자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작품이다. 그의 자(字)는 수가(粹可)이고, 호는 교은(郊隱)과 우곡(愚谷)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젊어서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의 문인들과 교유하였고 노후에는 성석린(成石璘)·이행(李行) 등과 교유하였으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교은집(郊隱集)」, 「화약고기(火藥庫記)」가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찬성사 신중(臣重)의 아들이며 1374년(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1376년(우왕 2년) 예문관검열이 된 뒤, 삼사도사, 공조·예조의 정랑, 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년)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고, 1398년 9월 이첨(李詹)·조용(趙庸) 등과 함께 군왕의 정치애 도움이 될 만한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리고, 곧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다. 1398년 조준(趙浚)·하륜(河崙) 등과 함께 「사서절요(四書節要)」를 찬진(撰進)하였다.

그의 증조는 청천군(菁川君) 대제학(大提學) 정을보(鄭乙輔)이고, 조부는 문부사(文副使) 정천덕(鄭天德)이며,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정신중(鄭臣重)이다. 그리고 이들은 애일당(愛日堂) 정분(鄭분) 정승(政丞)이니 문벌의 집안이며 충신의 집안이다.

시인은 고려 공민왕(1374) 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종(太宗:1410) 10년에 태조실록(太祖實錄)을 수찬(修撰)하고 다음 해에 검교 판 한성부사(檢校 判 漢城府事)가 되어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까지 겸임하였다. 태종 13년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지공거(知貢擧)도 겸임하였다. 그 후, 찬성사에까지 이르렀다.

시문(時文)이 준일청아(駿逸淸雅)하고 목은(牧隱) 포은(圃隱)과도 교분(交分)이 두터웠으나 자신 만이 벼슬길에 올랐다가 만년(晩年)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왔을 때에는 만감이 교차(交叉)하였음을 이 시로 하여금 시인의 감회(感懷)를 알 수 있다. 흥폐를 거듭하며 지나온 촉석루와 지나온 자신을 견주어 살펴본다. 조용히 잘 흘러오던 강도 깎아지른 절벽 앞에 오니 할 수 없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보고, 고려조에서 급제를 하고 삼은(三隱)과 교분을 두터이 하면서도 할 수 없이 역성혁명(易姓革命)이란 격랑(激浪)의 물결에 휩쓸려, 넓고 깊은 강물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자신이 이제 머리에 백설(白雪)이 내리는 백발노인(白髮老人)이 되어서 고향에 와서 광풍제월 맑은 하늘을 보니 고비마다 힘들었던 지난 일들이 떠올라서 명상(冥想)에 잠기어 구름과 같이 세류(勢流)따라 흘러간 자신의 심경(心境)을 읊어 보는 시라고 생각된다. 그는 1418년 70세로 치사(致仕)했다가 세종이 즉위하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진주 각처를 돌아다녔으며 곤명(昆明)을 태실소로 정하게 했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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