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랜 기병 이천 명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자 많은 병졸이 그 뒤를 따랐다. 벽제관(碧蹄館)에 이르니 동쪽 하늘이 비로소 밝아 왔다. 잠시 말을 멈추고 밥을 지어라 명하였는데, 적의 복병이 사방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제독이 들판에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있다가 북을 치면서 적을 맞아 싸웠다. 김전(金田)이란 왜첩(倭捷)이 곧장 제독에게 달려드니, 이여매(李如梅: 명나라 장수로, 제독 이여송(李如松)의 아우)가 그 왜적에게 화살을 쏘았다. 왜적의 기가 조금 약해지자 제독이 회군을 명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적들이 뒤쫓아 오려고 하였는데,
1919년 3월 18일(음력 2월 17일) 진주 장날 정오, 진주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시작된 기미년 진주 독립만세운동은 21일까지 4일간 시내 지역에서 지속해서 이어졌고 진주군 전체로는 5월까지 지속되었다. 주지하듯이 서울에서 3월 1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지어 경남에서는 3월 11일 오후 부산을 시작으로, 13일 동래와 밀양 등지로 퍼지었다.당시 경남도청 소재지였던 진주는 3월 18일,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경찰서와 헌병대를 중심으로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3월 10일 “삼남은 왜 일어나지 않는
우리 역사는 많은 주변 강대국의 침략과 억압에 의해 사대주의가 싹터왔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땐 문화 말살정책으로 우리 겨레의 전통이 뿌리째 흔들렸고,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어도 주체정신은 간곳없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모두에서 자주성을 상실했다. 또한 외래상품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오고 외채와 외국자본은 우리 경제를 잠식했다.진주에는 다행히 주체정신의 역사가 있었다. 1592년 김시민 진주목사가 군사 3,800여명으로 왜군 20,000여명을 물리친 진주성 대첩,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절한 의기(義妓) 논개, 부패와
근래 각 지자체는 지역특화산업보단 그들 지역의 고유한 역사와 전통, 문화재를 지역관광 홍보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는 정보·문화중심의 4차 혁명 시대에 발맞춘 지극히 바람직한 모습일뿐더러 우리 진주에도 정확히 부합되는 현상이다.우리 진주의 자랑거리라면 역시 지역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다양하고 우수한 관련 유산들로, 이번 호에선 그 중 고려 초기 유물인 진주 용암사지 승탑 부도(浮屠)의 역사성과 문화재로서 가치를 알아보려 한다.필자가 생각하는 진주의 자랑거리라면 장구한 역사, 수많은 인걸(人傑)의 지속적 출현, 그리고 충절
지난 38호와 41호에서 하륜의 「촉석루기」와 「촉석성문기」를 중심으로 하륜의 애틋한 진주 사랑과 촉석루 사랑을 살펴보았다.본고에서는 하륜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진주성의 출입구였던 촉석문과 공북문의 설립과정, 문화재적 가치 그리고 그 복원과정에 대해서 기술해보고자 한다.우선 진주성 두 개의 문인 촉석문과 공북문의 역사성이나 문화재적 가치를 살피기 전에 타 지역 성곽의 문에 대해서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그리하여 우선 서울의 왕성(王城)으로써 사적 제117호인 경복궁(景福宮)의 설립과정과 문화재적 가치를 고찰해보면, 설립
지난 8월16일 오후 3시, 진주시청 브리핑룸에서 서울에서 온 영화감독과 극단장이 소설 를 원작으로 영화와 뮤지컬을 제작한다는 발표회를 가졌다.평소에 본인은 진주에 살면서,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관련 고전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진주역사, 문화 관련 논문이나 기사를 발표한 바 있다.그러나 라이트형제가 1908년12월에 띄웠다는 플라이어호라는 비행기보다 무려 311年이나 앞서 1592년 진주의 하늘에 비차(비거)라는 비행물체가 날았다는 여러 자료 문건을 접했다.그래도 본인은 그 사실에 신빙성을 갖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워 지금
지난 39호에서는 하륜(河崙)의 촉석루 사랑이라는 주제로 기술했는데, 주로 그의 고향사랑에 대한 참모습이 지금까지도 절절이 담겨있는 진주사랑 이야기인 두 작품 즉, 와 중에서 에 관한 역사성과 작품성을 그의 인물론과 함께 기록해 보았다.두 작품 중, 오늘 본보에서는 그의 에 대한 내용과 형성과정 그리고 그의 진심어린 애향심에 대해서 논급하기로 하고 나머지 에 대한 상세한 번역이나 해설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이미 알다시피 고려말·조선 초기를 거쳐 진주에서 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도 ‘촉석루에서 교은의 시를 모방하다‘ 라는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高樓明月梅花時 높은 누각 밝은 달 매화꽃이 필 때에造物撩我拚一詩 조물주가 내 흥취 돋워 시 한 수를 내놓게 하네.銜巾靑鳥集錦筵 수건 물은 청조가 비단 자리에 모이니①醉興未覺繁華衰 취흥에 번화함이 쇠한 걸 깨닫지 못하도다.光風泛溢蘼蕪渚 풍광은 향초의 물가에 넘쳐흐르는데渚邊楊柳斜陽遲 물가의 수양버들엔 석양빛이 더디구려.欄干倚遍望雲海 난간에 기대어 구름바다를 두루 바라보니鐵笛暗和飛瓊詞 철적 소리가 은연
지난 호에서는 진주성 내에 산재되어 있는 여러 주련들 중에서 촉석루 주련과 영남포정사문루의 주련의 내용을 작가의 행적과 두 누각의 문화재적 역사성 중심으로 기술해보았다.본 호에서는 진주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진양(진주) 정씨 은열공파 대종회 재실이 있는 청계서원(淸溪書院) 내의 경덕사(景德祠) 주련을 찬(撰)한 중재(重齋) 김황(金榥)의 행적과 본 서원의 역사성을 바탕으로, 소위 봉남서원(鳳南書院) 주련(柱聯)을 소개하고자 한다.鳳南書院 柱聯鳳山盤屹仰止彌高 우뚝 솟은 비봉산 우러러 볼수록 높고,藍水澄淸源來有自 맑은 남강 물 맑은
지난 제30호부터 34호까지는 진주성 촉석루 내부에 걸려있는 여러 편의 유명 시문(時文)을 그들 작가의 사상과 행적 그리고 그 역사성과 문학성 중심으로 읽고 해설했다.이제 본 35호에서는 전국 여러 유적지의 누각과 제각(祭閣) 또는 사찰 등의 기둥에 새겨져 있거나 직필, 부착되어 있는 다양한 형태의 주련(柱聯)의 글귀가 시문 못지않게 많이 기록되어있다.그리하여 본 호에서는 그런 주련의 의미와 중요성은 물론 문학성을 고찰하면서, 특히 우리지역 진주성 내에 있는 유적건축물에 부착된 몇 편의 주련에 대해서 그리고 그 건축물의 설립경위와
제30호부터 지금까지 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서 유명한 문신·문걸들이 진주·진양 경관 그리고 남강과 촉석루에 관해 지어졌던 시문(詩文)을 그들의 행적과 함께 소개했다. 그러나 이번 제34호에서는 상기 관련 내용의 기사는 우선 끝내고, 다음부터는 진주성 내에 있는 주련(柱聯)들을 소개하기로 한다.오늘은 먼저 고려말 극도의 혼란시기에 당시의 이단과 세류에도 동요되지 않고 오직 정직하고 청렴결백했던 문신이자 문걸이었던 백문보(白文寶)의 촉석루 관련 작품과 그의 행적 및 사상을 기술하기로 한다.登臨偏憶舊遊時。
제30호에서부터 지금까지 고려·조선조에 뛰어난 문신이나 문걸들이 진주 및 촉석루의 경관이나 역사적 사실을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낭만으로 노래했던 작품들을 그들의 개인적 행적과 사상을 바탕으로 기술해 왔다. 특히 이번호에서는 먼저 중국 당(唐)대의 시선(詩仙)이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유명하여 거의 중국문학에 전설적인 시인인 이백(李白)조차도 감동했던 중국 당(唐본)대의 시인인 최호(崔顥)가 읊었던 중국의 호북성 무창현 황학산에 있는 그 유명한 황학루(黄鹤楼)와 축석루를 비교해서 노래했던 고려 말 뛰어난 문신인 면재(勉齋
본지의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에서는 지난 30호부터 진주 촉석루 경내에 걸려 있는 전대 명인들의 시문(詩文)을 그들 작가의 행적과 사상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제30호에서는 경재(敬齋) 하연(河演)과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제31호에서는 우당(憂堂) 박융(朴融)과 만송(朴融) 강렴(姜濂)의 작품들을 원문과 함께 감상해보았다.본 32호에서도 계속해서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와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진주 촉석루에 관한 시문을 작가의 행적과 작품해설 중심으로 기술해 보기로 한다.우선은 현재 진주 반성면의 충
지난 제30호부터는 진주의 많은 문화유산들 중에서 진주성 촉석루 안에 현판으로 지금도 걸려있는 전대(前代)의 유명한 문걸(文傑)들이 남긴 시문(時文)과 그들의 행적과 사상을 살피기로 했다. 이번 제31호에서도 진주성 촉석루를 노래한 고려·조선 양조에 뛰어난 명인들의 촉석루에 관한 시와 그들의 행적과 사상을 계속 소개하기로 한다.이번 호에서는 먼저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이었던 박융(朴融), 강렴(姜濂)의 작품과 그의 일생을 작품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晉山形勝冠南區 진주의 경치는 남쪽에서 으뜸인데況復臨江有此樓 하물며 남강
▣ 출생과 성장배경1895년 12월 10일 진주시 나동면 삼계리 791에서 태어난 박재수(朴在秀·1929년 6월 15일 사망) 선생은 유림들의 항일투쟁을 위해 경남유림대회를 개최하려고 격문 수천 장을 만들어 살포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약 1년간 옥고를 치렀다.박재수 선생은 유명한 진주시 나동면 삼계리 태안박씨로 호칭되는 집안으로 민족운동, 교육운동을 전개한 항일투쟁의 산실로 존칭되는 훌륭한 이들이다.박 선생은 박주형(朴周衡: 초명 朴東衡)과 진사(進仕) 하재원(河載源)의 딸과의 슬하에 태어났다. 부친 박주형은 벼슬이 통
▶지난호에 이어 그 다음 역시 촉석루 안에 걸려 있는 또 다른 시문을 보기로 한다. 상기 하연의 시와는 달리 매우 긴 7언시로서 서체는 비교적 알아보기 쉬운 해서체로 되어있다.興廢相尋直待今 흥폐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르러層巓高閣半空臨 층층바위 절벽위에 높은 루가 하늘에 닿았네.山從野外連還斷 들 넘어 산줄기 끊어질 둣 이어 돌고江到樓前闊復深 누각 앞에 이른 강은 넓어지고 깊어지네.白雪陽春仙妓唱 백설 양춘은 기생들이 즐겨 부르고光風霽月使君心 광풍제월은 군자의 심사로다,當時古事無人識 그 때의 옛일을 뉘라서 알리오 만倦客歸來空獨吟
▶30호에 이어 ▣ 도청이전 반대와 기타 활동박용근 선생은 1923년경부터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부산 이전을 반대하는 위원(委員)으로 활동하게 된다.조선 종이 수천 장을 구입해 격문을 만들어 배포하려고 준비하던 중 일경에 의해 발각(發覺)되어 집안 전체가 수색(搜索)당하는 일도 있었다. 박준기 아들이 7세 때 조선 종이로 격문을 만들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가족들이 모두 경찰서에 잡혀 간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박준기 지사가 말하기를 부친께서 측량기술을 배웠다는데 정확한 문헌 근거가 없다. 일제가 전답을 측량하고 측량기술
박용근(朴龍根) 선생은 진주시 비봉동(계동, 봉곡동) 150번지에서 태어났거나 성장지로 알려져 있다. 이 기록은 경찰청(警察廳)의 기록을 근거로 인용(引用)한 것이다.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 재판기록에도 비봉동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후손들이 말하는 본적지(本籍地)는 진주시 수정동 107번지라고 말하고 있다.선생은 모든 기록(記錄)마다 동일(同一)하게 1883년 7월 3일 생으로 기록되었고 에서 1884년이라 기록된 것은 계산착오였을 것이다. 1963년 5월20일 진주시 사회계로 보고한
지난 2017년 11월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본사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에서는 무려 29회에 걸쳐 진주 일원에 산재되어 있는 각종 유명 문화재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문헌과 자료를 근거로 그 가치와 역사를 재조명해왔다.이번 30호부터는 고려·조선 양조에 걸쳐서, 전국적인 명인(名人)들이 그간의 우리 진주·진양의 경관과 사연을 읊고 노래해 남긴 유명 시문(詩文)들을 작가들의 평전(評傳)과 그들 작품해설 중심으로 기술해보고자 한다.우선은 현재까지 진주성 촉석루 내에 걸려 있는 시판의
▶지난호에 이어 곧 국민회, 혈성단, 신간회, 기독교청년회 등에 가입하였는데 이들 단체들은 모두 진주지역만을 위한 지역 단체가 아닌 전국 규모의 단체이거나 임시정부와 관련된 단체라는 사실이다.그러므로 진주YMCA 역시 지역 단체 겸 서울을 중심으로 한 YMCA이었음이 확실하다. 강우석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였으며 진주에서 조직된 전국 규모의 단체인 진주YMCA, 국민회, 혈성단, 신간회 등에 모두 가입하고 활동한 분이다.「대구 YMCA 80년사」 112~115면에 합천 YMCA, 초계 YMCA 등이 있었고 대구에서 강연하기 위해 방문